[◆A / 테츠준] Out of your league
유우키 테츠야 X 이사시키 준
Out of your league
J는 이번에도 오지 않았다.
소주 한 잔을 들이키고서 T는 소리나게 상에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술기운이 링거 주사처럼 으슬으슬하게 몸 속을 퍼져나가는 느낌이 생경하게 전해지며 얼굴에 피가 몰려 뜨거워졌다. 원래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처지이긴 하지만 오랜만의 자리에서까지 관리 명목으로 스스로를 다그치기는 싫었다. 지글거리는 고기 굽는 소리와 시끌벅적하고 낯익은 목소리들은 한데 섞여T의 귀를 쉼 없이 휘감아 댔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 실없는 옛날이야기를 낄낄거리는 후배들을 보고 있으면 목소리란 참 더디게 늙노라는 생각이 들었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엇이 그렇게 할 말이 많아서 만나기만 하면 계집애들처럼 수다를 떠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T의 머릿속에 잠깐 익숙한 한 얼굴이 스쳤다. 그가 왔으면 자신도 저들처럼 말이 많아졌을까.
- 선배님?
T는 고개를 돌렸다. 무스를 발라 멋들어지게 머리를 세운 후배 하나가 술병을 내밀며 씩 웃고 있었다. 눈가에 잡힌 잔주름을 빼면 자신이 기억하는 열여덟 때의 얼굴을 간직하고 있는 K였다. 그가 예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옆에 앉아도 되냐 묻자T는 말없이 가방을 치웠다. K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걸터앉고는 상에 팔꿈치를 올린 채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간만에 OB모임인데 주장님이 혼자 마시고 있으면 저희 체면이 뭡니까, 하며 K가 내미는 잔을 받아든 T는 보일락 말락 미소를 지었다.천성적인 유쾌함은 세월이 파묻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1년 전에 한 의류기업에 취직했다고 했다. 부장님이 자신의 팬이라느니, 사인 한 장을 받아가야겠다느니 떠들던 K가 T에게 수첩 한 장을 찢어 내밀었다. 어제 선배님 경기 회사에서 다 같이 봤습니다. 9회 말 투 아웃 2루 상황에 극적의 역전 투 런! 캬, 역시 우리 학교 간판. T는 미소를 지으며 나름 정성스럽게 마무리한 사인을 내밀었다. 기왕이면 직관으로 오지 그래? 장난스런 T의 대답에 K는 낄낄 웃었다.
- 아, 맞다. 선배 이번에 미국 가실지도 모른다면서요. 축하주 한잔 하셔야죠?
- 그래. 고맙다.
- 아하하, 건배. 캬, 술맛 좋ㅡ타. 그러고 보면 선배님도 OB모임은 지독하게 오랜만 아녜 요? 이제 TV에서나 본다니까, 스타야 스타.
T는 술잔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갔다가 내려놓았다. 언론에서 자신을 두고 떠들어대는 말들을 떠올리자 올랐던 취기가 가라앉는 것 같았다. TV니 스타니 하는 말을 들으려고 데뷔한 건 아니었지만, 학생 시절부터 촉망받던 타자가 필드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수많은 신문 기자들과 카메라들이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게 되었다는 말과 동일했다. 데뷔한 이래로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춘 지 꽤 되었는데도 기자들의 호들갑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늑대 타자, 9회 말의 사나이, 체인지업 슈터 등등. 제 귀로 저를 그렇게 가리키는 말을 듣는 건 몇 번을 겪어도, 기름진 피자 두 판을 통째로 위에 쑤셔 넣은 것 같이 느글거리는 일이었다. 프로 선수치곤 얼굴이 돼서 그런 게 아니겠냐며 깐족거리는 K의 등짝을 T는 시원하게 한 대 후려갈겨 주었다. 기자들의 이목이 늘 부담스러워 경기가 끝나면 누구보다 빠르게 사라지는 T였다. 덕분에 신비주의 컨셉까지 얻어 호들갑이 더욱 심해졌다는 게 문제였지만.
- 뭐, 나만 프로에 있는 것도 아니고...
- 그래도 캡틴은 독보적이죠. 타자로 메이저리그 가는 건 나라에서 두 번째 아녜요?
- ....세 번째야.
- 하하하, 뭐야. 은근히 자랑하시네.
얘기 나와서 말인데요, 이번에 우리 학교 전국대회 본선 갔대요. 그 고등학교 꺾고. K의 말에 T는 잠시 앞을 바라보더니 아까 내려놓았던 술을 들이켰다. 입술을 닦자 손등에 술 몇 방울이 묻어나왔다. K는 잠시 T를 살피다 자신이 말을 잘못했냐 물었지만 T는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오래된 TV가 힘겹게 흐릿한 전파를 연결하는 것처럼 고장난듯한 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T의 고등학교는 수많은 프로 선수를 배출해온 야구의 명문고였다. 그런 학교에서 야구부 주장이자 4번 타자라는 명패를 짊어졌던 T는 학교를 거쳐 갔던 수많은 선수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인재로 촉망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최고 학년이었던 여름,한 발만 내딛으면 전국대회였던 그 결승전에서, 숙명의 라이벌 고등학교에게 그의 팀은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그 후 T는 곧바로 프로야구에 입문하자는 수많은 구단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일반 대학으로 진학하여 대학 아마추어 팀에서 뛰었다. 그러던 그를 눈여겨본 한 감독의 끈질긴 구애와, 고교에서 야구부 감독을 했던 선생님의 설득으로 비로소 프로 세계로 발길을 돌린 것이었다.
- 결국 그렇게 됐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 같이 모이면 그 날이 제일 먼저 생각납디다.
- 하하. 네가 병살 하나 잡았었지. 6회 말에.
- 세상에, 선배 그거 기억해요? 아까 R선배는 기억도 못하던데 감동 받았어요.
- 너무하네.
- 그쵸? 같이 잡아 놓고 말이야. 아으, 이건 왜 이렇게 쓰냐. 사실, 선배님, 저는 말입니 다. 우리가 동점 만들었던 때가 솔직히 요즘도 가끔 생각이 난단 말입니다. 그 때의 그 전율, 카타르시스라고 할까요, 그런 기분이 떠오를 때면 다시 그 날로 돌아가서 야구를 하고 싶은...
T 역시 그 날을 바로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시 라이벌 고등학교에는 현재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투수로 활약 중인 선수가 에이스로 있었다. 3대 4로 1점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감독이 포기하라 지시했던 그 선수의 체인지업을, T가 8회초 2아웃 2스트라이크 1,2루 카운트에 쳐냈던 것이었다.
- 그때 J선배가 뭐라고 하신 줄 알아요? T선배는 감각이 동물이라서 투수가 계산을 해서 돌려세울 수가 없는 타자라고. J선배도 그거 아시고 도루하셨던 거고요.
그 때 그 투수에게서 4점을 뽑아낸 것은 전국을 통틀어 T의 팀의 유일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은 바로 그 J의 도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T는 생각했다. 야구라느니, 4점이라느니, 유격수라느니 뭐라뭐라 중얼거리는 K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멀어져 가는 것을 느끼며 T는 술을 한 잔 더 들이켰다. K가 무심코 내뱉은 J의 이름이 귀를 간지럽혔다.
J는 팀의 부주장이자 3번 타자였다. 주장이자 4번 타자였던 T와는 소위 세트메뉴처럼 붙어 다니던 친구이기도 했다. 고향에서 야구 유학을 왔던 그는 원래 투수였지만 제구력이 좋지 않아 중견수로 포지션을 바꾼 후, 타격훈련에 매달려 클린업 자리를 따냈다. 커다란 목소리, 우렁찬 기합, 그렇지만 사실은 170도 되지 않는 조그마한 몸집. 키가 작은 게 콤플렉스였는지 남자답게 보이고 싶답시고 열아홉의 나이에 턱수염을 짧게 길러 늘 액면가 30대라는 오해를 사곤 했었다. 하지만 부원 중에 가장 눈물이 많아서, 속상한 일이 있으면 남들 뒤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던 것도 그였다. 투수를 그만두겠다고 결정한 그 날에도J는 기숙사 뒤켠에서 고개를 숙이고 웅크린 채 숨죽여 흐느끼고 있었고, T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가 일어설 때까지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T는 빈 술잔에 술을 다시 채웠다.
-아.. 선배님. J선배 얘기 나와서 말인데요. 요즘 연락 하세요?
불쑥 K가 물었다. T는 멈칫했다.
- 아니. 끊긴 지 몇 년 됐어.
- 그래요? 딴 사람은 몰라도 선배랑 연락 안 되는 거면 진짜 잠수하셨나 보네.
- 다른 사람도 연락 안 된대?
T는 술잔을 비웠다.
- 몰라요, 애들 다. T선배는 아실 줄 알았는데.
- 나도 몰라. 어디 회사 들어갔다는 것까지만 들었어.
- OB모임도 거의 안 나오시고... 2년 전에 선배 안 오셨을 때 한번 잠깐 얼굴 비추고 가 셨다는데 딱히 누구랑 얘기도 안 하고 그냥 가셨대요.
J는 패하고 돌아온 그날 처음으로 T의 어깨에 기대어 아이처럼 울었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고등학교 3학년의 여름에 그들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열아홉의 나이엔 견디기 힘든 가시왕관이었다. 어깨를 들썩이는 J의 턱에는 정리하지 못한 수염이 지저분하게 눈물에 젖어 있었고 T는 자신의 옷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너도 울란 말이야. 왜 네가 아직까지 캡틴인 줄 아냐고. 왜 혼자 울지도 못하고 그러고 있냔 말이야. T는 눈물을 흘렸다.
그 후 프로선수의 길을 일찌감치 포기한 J는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일반 대학수험을 준비했다. 목이 쉬어라 울던 것치고는 빠르게 길을 정해버리는 모습을 보고 T는 다소 조심스럽게 야구를 그만할 생각인지 물었지만, J는 그런 건 또 아니라고 대답했다. 지나가는 말로 J는 툭 던졌었다. 그래도 너 오라는 구단 많아서 다행이다.
두 사람은 같은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J는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거기서 학교를 다닐 모양이었다. 대학생이 된 이후 두 사람은 한동안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T가 J를 만나러 내려갔던 적도, J가 T를 만나러 올라갔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가고, 바빠지고, J는 취업준비생이 되고, T가 대학 야구팀의 주장이 되면서 점차 뜸해진 연락은 T가 프로 데뷔를 하면서 끊겼다. J는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먼저 연락하지 않았고, T는 하루 걸러 있는 경기를 소화하느라 누군가에게 연락을 할 짬을 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T가 J의 소식을 들은 것은 그가 한 회사에 정규직으로 취업했다던 5년 전의 일이었다.
- 야.
- 네?
- 건배.
목구멍을 타고 강한 알코올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코가 뜨거워지며 얼굴로 열이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 팀이 전국체전 본선에 올랐다는 소식이 퍼진 모양인지, 옆 테이블에서 후배들이 술잔을 들고 ‘S고 야구부를 위하여!’ 라는 구호를 외치는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나 갈게. T는 손등으로 입술을 닦고 잠시 멍하니 있다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가시게요? K의 물음에T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갑에서 5만원 두 장을 꺼내 주었다. 어이! 다 일어나세요! 여기 T선배 가신답니다! K가 소리치자 모두의 주목이 쏠렸다. 자자, 곧 메이저리그 가실 자랑스러운 S고 주장님께 박수! 후배들, 동기들, 선배들 할 것 없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머릿골이 윙윙 울려왔다. T는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 가게를 나왔다. 늦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원한 공기가 뺨을 감쌌다. T는 뒤를 돌아보았다.
* * * * *
몇 주가 흘렀다.
늦가을치고는 왠지 맑고 따뜻한 날이었다. TV 안의 기상캐스터는 습도가 높지 않아 빨래를 널거나 외출하기 좋겠다며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마추어들과 친선경기를 하기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오프 시즌에 접어들자마자 구단 감독은 계열사 한 군데의 사회인 야구팀과 친선경기를 하게 됐다고 떠들어 댔었다. 그 야구팀 주장이 감독의 아주 친한 친구라던가, 감독이 그 경기를 매우 하고 싶은 눈치였기에 4번 타자인 그가 참여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T는 몸에 감긴 이불을 느릿느릿 떼어내고 일어나 앉았다. 시계를 보니 12시 30분이었다. 2시까지는 감독이 말한 친선경기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아직 메이저리그행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계약서만 작성하면 끝날 단계까지 와 있었던 만큼, 아마 이 친선경기가 국내에서 하는 모든 공식ㆍ비공식 경기를 통틀어 마지막 경기일 것 같았다.
습관적으로 커튼을 열고 냄비에 물을 받아 인덕션에 올려놓은 채 T는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 아삭아삭 씹었다. 유리창을 투과해 들어오는 햇빛이 반대편에 그림자를 그렸다. 그러자 평소보다 집이 더 넓어 보였다. 사과를 다 먹고 끓인 물을 미숫가루에 부어 한 컵 마신 뒤 간단한 샤워를 하고 머리를 조금 만지고 옷걸이에 대충 던져둔 팀 티셔츠, 청바지, 야구잠바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짧고 검은 머리를 한 청명한 눈동자 한 쌍이 거울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나이가 들었군.
입가와 뺨에 진 잔주름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벌써 까끌하게 올라오는 턱수염을 손으로 쓸자 긁힌 손등에 얼얼한 느낌이 남았다. T는 거울 옆의 옷장을 열었다. 삼십대의 남자가 혼자 사는 집 치고는 깨끗하게 정리된 옷장 안에 나란히 놓인 야구모자들 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고등학교 때 썼던 모자였다. 바래진 파란색과 튿어진 ‘S’라는 글자. T는 모자를 집어들었다. 쓴 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먼지가 보얗게 앉아 있었다. 대충 손으로 먼지를 털어낸 후 모자를 썼다. 붉은색의 팀 언더셔츠에 얹힌 파란색 모자가 이질적으로 보였다.
꼭 유니폼을 입고 와야 한다고 하진 않았으니까.
T는 그 모자를 다시 조심스럽게 눌러썼다. 1시 20분이었다.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저 밑바닥에서부터 진동하는 무언가가 척추를 타고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모든 세포가 그의 뇌에 이것이 현실인지를 묻고 있었다. T는 눈을 끔뻑였다. 발을 통해 전해지는 땅을 딛은 감각은 그가 꿈을 꾸는 것이 아님을 일깨웠다.
- 계열사 아마추어 직장인 야구팀이라고....
- 그래.
뭐 문제라도? 감독이 되물었다. T는 제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어떤 관용어구로도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할 터였다. 배트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표정을 본 동료들은 무슨 일이냐며 T에게 다가왔지만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의 팀 가운데에서 그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T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T를 한번 힐끗 쳐다본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개인적인 소식은 모르고 지냈을지라도 세상이 TV에 지배당하고 있는 이상 이곳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역시 했을 것이다. 자신은 몰랐어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 달 전부터 약속되어 있던 경기였다. 연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이 경기에서 빠지겠다며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T에게서 제 팀을 향해 등을 돌렸다. 등번호 1.
T는 옅은 바람에 흩날리는 갈빛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그는 J였다.
- 정렬. 경례.
당연히 그가 주장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J보다 더 잘 치는 타자가 있다는 뜻인지 T는 궁금했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튼실한 몸집의 상대 팀 주장과 악수를 나눈 T는 초 공격을 결정했다. 이거이거, 저희가 말 공격이라니 배려 받는 기분이네요. 콜드는 적용 안 한다고 하니까 9회까지 재밌게 놀아 보죠. 마흔은 넘어 보이는 상대 팀 주장이 실없이 웃는 동안 T는 몇 발자국을 사이에 둔 채 여전히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J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과 짧은 턱수염은 여전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조용해진 점이랄까. 손을 잡고 싶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이라는 쉬운 인삿말이 T의 혀끝에 맺혔다. 하지만 꼭 성대가 고장나버린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J는 큰 소리로 기합을 한 번 지르더니 외야로 달려갔다.
외야라니, 마운드에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때처럼 중견수 자리에 가서 서 있었다. 1번을 달았으면서 선발 투수가 아니라는 것이, 본인이 원한 일이었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쪽 벤치와 외야는 거리가 멀어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T는 멍하니 저쪽을 바라보다 동료들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연습 캐치볼이 끝난 모양이다.
- 플레이볼!
심판이 경기 시작을 알렸다. 포수가 사인을 한 채 주저앉았고 투수가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폼이 볼 만 하다. T는 머릿속에 공을 치는 자신을 상상했다. 아웃이다. 첫 타자 아웃, 상대팀 벤츠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J도 함성을 질렀다. T는 배트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아웃은 거기까지였다. 1회 초 공격에서 T의 구단은 2번, 3번 타자를 차례로 출루시켰고 4번인 T는 깔끔한 2루타를 때렸다. 1회 득점 3점. 수비하는 모양새나 송구 타입을 보건대 아마추어 치고는 괜찮은 팀 같았지만, 그래도 프로와의 차이는 당연한 것이었을까. 이쪽 에이스를 내보내지 않았는데도 2, 3회가 거듭되도록 상대팀은 점수를 뽑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허허, 안 봐 주시네요. 상대팀 주장이 말을 걸었지만 T는 대답하지 않았다. 3회 말에 J가 오른쪽으로 파고드는 크로스 파이어를 쳐냈지만2루수 플라이가 되고 말았다. 공을 쳐낸 후 이쪽으로 달려오다 플라이를 확인하고는 짧게 욕을 뱉으며 돌아서는 J를, T는 끝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1루에 있고 싶지 않았다.
게임은 4회까지 9대 0으로 이어졌다.
- 3번. 중견수.
5회 말. 타석에는 J가 섰다. 실질적으로 이 팀에서 제일 잘 치는 건 저 타자지? 심심했는지 심판이 T에게 말을 걸자 T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3번 타자가 4번 타자보다 잘 치는 타자라니, 우스웠다. T는 글러브를 내민 채 숨죽이고 J를 바라보았다. 커브. 스트라이크! 젠장! 그건 볼이었는데. 처음부터 손이 나가는 건 여전하구나. T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쌀쌀한 바람이 스쳐 곧바로 땀이 식자 체온이 훅 내려는 느낌이 들었다. 인코스의 슬라이더, 스트라이크. 카운트가 몰렸다. J는 볼을 골라내는 타입이 아니다. 이번에 치지 못하면 삼진이었다. 잠시 앞을 바라보던 투수가 팔을 휘둘렀다.
까앙
금속 배트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 T는 멍하니 날아가는 공을 응시했다. 공은 좌익수와 중견수를 가르는 외야 바닥에 떨어졌다. J는 맹수가 포효하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달렸다. 좌익수는 아직 공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2루타. J가 가까워 왔다. 공은 아직이었다. 그의 발이 1루 베이스를 눌렀다.
- 엥?
- 뭐야, 안 달려?
- 저 장타를 1루타로 끝낸 거야?
J가 1루에 멈춰 있는 동안 좌익수는 공을 잡았고 놀랄 만큼 유려한 동작으로 백홈 송구를 성공시켰다. 투수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마운드를 발로 차며 이쪽을 노려보았다. J는 예의 인상 궂은 표정을 짓고는 입을 꾹 다문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T는 J를 쳐다보았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뛸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새가 열아홉 살 시절의 그에게서 전혀 달라짐이 없었다. T는 입을 떼었다.
- J...
- 좌익수가 잡은 걸 본 것뿐이야.
J는 T를 쳐다보지도 않고 툭 내뱉었다. 안녕이라는 인사도 오랜만이라는 말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과격하고 퉁명스러운 한 마디. 5년 만에 만난 친구에게 처음 한다는 말이 ‘좌익수가 잡은 걸 본 것뿐이야’ 라니, 참 그답다는 생각을 하며 T는 피식 웃었다. 왜 웃어. J가 불쑥 물었다. 아냐. 반가워서. T가 J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J는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상대팀의 다음 타자가 친 공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T는 글러브를 낀 손을 뻗고 위로 뛰었다. 글러브 안에 공이 들어왔다. 쓰리 아웃, 체인지! J는 멈춰 서서 쳇, 하고는 뒤돌아섰다. 벤치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를 T가 뛰어가서 잡았다. 왜인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J는 부리부리한 인상을 지으며 T를 돌아보았다.
- 왜.
- ...아, 아니... ...건강해 보인다고...
바보 같은 소리를 우물거리는 T를 빤히 쳐다보던 J가 돌연 하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 그래 건강하다 임마.
- .....
- 됐어. 경기 중이니까 끝나고 보자고.
J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T의 손을 떼어냈다. 가까이 서 보니 두 사람 다 열아홉 살 때의 키가 그대로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는 그대로 자신의 벤치를 향해 멀어졌다. T는 입을 다물었다.
6회 초.
- 잠시 타임.
심판이 손을 들어올렸다. 상대 팀 벤치가 움직이는 듯했다. 선수교체. T는 눈썹을 올렸다. J가 마운드로 올라오고 있었다.공을 쥔 채로 J는 마운드를 탁탁 발로 쳤다. 1번을 짊어지고 있는 J의 등이 이상하게 낯설어 보였다. 솔직히 고등학생 때는 상상조차 잘 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기에 T는 그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내심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고 싶었다.타선은 하위 타선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프로. 고등학교 시절에, 팔 힘을 주체하지 못해 폭투를 하곤 했던 그가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을까? T는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 3자 삼진! 쓰리 아웃 체인지!
벤치가 술렁였다. 3타자 연속 스트라이크 삼진. 외려 담담한 것은 J 쪽이었다. T는 배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운동장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특기였던 J, 선배들로부터 넌 고함을 안 지르면 못 치는 모양이지? 라는 말까지 들었던 마당에,그는 조용했다. 짧게 기른 턱수염이 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때처럼.
시합은 고착 상태로 빠져들었다. 고착 상태라고 하기엔 9대 0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이긴 했지만, 8회 말까지 양 팀 모두 점수를 내지 못했으니 그런 느낌이 들 법도 했다. 타순이 한 번 돌아온 상황에서 T는 J의 공을 치지 않았고 J는 T를 볼넷으로 걸어 나가게 했다. 모조리 한가운데에 꽂아 넣는 직구, 치려고만 든다면 못 칠 것도 없을 법 한데도 T는 팔을 뻗을 수 없었다. J가 끝까지 팔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차마 타석에서 J를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이, 메이저리그 행 4번 타자님 왜 안 치시는 거세요? 투아웃 만루 때 그 사우스포 커터볼도 다 치시던 분이? 낄낄낄. 동료들이 농담을 걸었지만 T는 한번 웃어주고 말 뿐이었다.
9회 이닝이 왔다.
경기 결과는 누가 봐도 T의 팀이 승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 팀은 그다지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저 프로들과 한 판 붙어볼 수 있다는 게 재미있는 경기. 저쪽은 아마추어니까. 아무도 친선경기에 점수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저쪽 선수들도, 이쪽 선수들도. 동료들은 찌뿌둥한 어깨를 주무르고 잡담을 나누었다. 저쪽 벤치에서 상대 팀의 주장과 실없이 수다를 떨고 있는 감독을 보며 T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때와는 다르다. 1점 하나에 목숨을 걸었던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는 것이다. 이번에 지면 다음에 이기면 된다. 시간은 많고 햇수는 바뀐다. 몸값이 높아지고 낮아지고의 문제가 달려 있을 뿐, 프로의 세계에서 되갚을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 승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 4번. 1루수.
T는 타석에 섰다. J와 눈이 마주쳤다. 불타고 있다, 의지로 형형하게. 하품을 하며 타석에 서는 T의 동료들을 상대로 그는 이어지는 이닝 내내 스트라이크를 던졌다. 언제 저런 투구를 하게 되었는지 T는 알지 못했다. 헬멧을 눌러 눈을 가렸다. 창피하게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자신의 어깨에 몸을 기대어 들썩이던 J의 감촉이 여적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럴 것이다. 아마 은퇴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 몇 번이고 다시 싸울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렸던 날의 승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마지막 여름, J와 자신의 마지막이었던 그 여름은,
- 스트라이크!
돌아오지 않는다. 승부는 단 한 번뿐이다. 되갚을 기회가 있는 승부란 없다.
지면 끝이다.
J가 다시 팔을 휘두른 건 눈 깜짝할 사이였다. 공은 포수를 향해 직선으로 날아왔다. 보기보다 빠르다고 느껴진 순간 공은T가 휘두른 배트 밑을 스치고 뚝 떨어졌다.
싱커볼.
J의 표정에는 미동이 없었다. 그는 시구를 끝낸 자세 그대로 표정 없이, 헛스윙을 한 T를 바라보고 있었다. T는 자신에게 꽂힌 채 번득이는 J의 시선을 맞받아치며 배트를 들었다.
돌아올 수 없는 시간 앞에서 너를 그 무대에 데려다주지 못했다.
내가.
J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왼쪽으로 내리찍듯이 휘두른 T의 배트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든 직구를 쳐올렸다. 좌익수! J가 소리를 질렀다. 날아오르는 공의 궤적을 보며 뒤로 성큼성큼 물러나던 좌익수의 등이 펜스에 닿았다.
- 솔로 홈런!!!
- 역시나 메이저리거!!! 아 확정은 아니고...
- 저 자식, 칠 거면서 왜 아까까지 안 쳤대?
T는 베이스를 밟으며 팔을 쭉 뻗었다. J의 표정은 미묘했다. 기분이 나쁜 것 같기도 했고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몹시 괴로운 것 같으면서도 싫지 않은 것 같았다. 왜 안 쳤냐고? T는 벤치로 들어가면서도 J를 쳐다보지 않았다.
* * * * *
게임은 그렇게 끝났다. 9회 말, J에게 타선은 돌아오지 않았고 깔끔한 10대 0의 완승이자 완패로 양 팀은 정렬했다. 주장과 하는 둥 마는 둥 한 인사를 나눈 후 T는 벤치로 돌아가려는 J를 몸으로 막아섰다.
- 왜?
- 끝나고 술 한잔 하자.
- 둘이?
- 어.
- 나 회사 사람들이랑 회식할 거 같은데.
- 안 돼.
J는 T를 빤히 쳐다보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 뭐야, 너 안 된다는 말도 할 줄 아냐?
- 나랑 마셔.
- 야야, 우리 5년 만에 처음 만나는 거라고. 어색하지도 않아?
- 5년 만이니까 나랑 술 마셔.
- 하이고.
난 너 어색한데 어떡하냐? J는 시원하게 웃었다. 농담이야, 얼굴 펴 인마. 알겠어. 오랜만에 베스트 프렌드를 만났는데 회포는 풀어야지. 여기서 기다려. J는 T의 가슴을 주먹으로 한 번 치고는 회사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아까까지 주장이었던 사람과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던 J는 가방을 든 채 T에게로 걸어왔다. 알겠대. 그래? 그럼 가자. 어디 갈까? 술 마시고 싶다며. 술집? 너 좋을 대로. 난 치킨집도 좋아. T는 차키를 꺼내들었다.
- 어어. TV로 다 보고 있었어.
J는 한 잔 더 원샷을 했다. 보기와 다르게 술이 센 편이 아니었던 것 같아서, T는 그에게 너무 빨리 마시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J는 낄낄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이쪽 테이블을 힐긋거리던 몇몇 사람들이 T에게 혹시 야구선수 아니냐며 말을 걸자T는 정중히 그렇다고 대답하며 사인 요청을 거절했다. 사람들이 다녀갈 때마다 J는 피식피식 웃었고 T는 그 웃음에 묻어 있는 물기를 외면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 LA 다저스랑, 필... 아니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맞지?
- 아니. 필라델피아 필리스.
- 아 그래? 뉴스는 너 다저스로 결정됐다고 하던데 맞냐?
- 아마도.
- 좋겠구만. 출세했네.
T는 대답하지 않고 J를 바라보았다. 골뱅이소면을 먹던 그가 응? 하고 고개를 들었다.
- 있잖아.
- 엉?
- 너 오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어?
- 어.
- 그런데도 나온 거야?
- 나오면 안 되냐?
뻔뻔한 듯 능글맞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T는 처음 자신을 발견하고 눈에 띄게 시선을 피하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지금도 묘하게 그는 자신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왜, 나 만나니까 싫어? T는 J를 찌르듯이 쳐다보았다. J가 찔끔하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왜 나를 봤어도 아무 말도 걸지 않은 거야? T는 자신이 말하고도 못나게 들린다는 생각이 들어 문득 창피해졌다. 아, 그거야, 너한테 내가 먼저 아는 척 하면 피곤해지니까 그렇지. 너도 그렇기야 하겠지만, 난 윗사람들한테 조금이라도 튀는 꼴을 보이면 안 좋을 수도 있단 말이야. J가 술을 마셨다. 우린 이제 고등학생이 아니라고.
- 너 직급 낮아?
- 좆밥 과장이다.
- 네 윗사람은 누군데?
- 우리 야구팀 주장님.
- 그 사람이 보스야?
- 아. 우리 부사장님이거든.
- 부사장..? 나이 별로 안 많아 보이던데?
- 낙하산이지, 임마. 요즘 세상에 실력으로 부사장 올라가는 새끼가 어딨어.
- 그 사람 지독하게 못 치더라. 4번 타자는 무슨. 빽이겠지?
- 빽이지 뭐... 크으.
근데 진짜 기막힌 우연 아니냐? 이 빌어먹을 놈의 사회라는 곳에 나와서 예고 없이 니 면상을 마주칠 줄이야. 역시 너랑 나3년 동안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있었던 인연이 아직도 안 끝났나 보다, 야. 이모, 여기 소주 하나 더요. 네, 참이슬로. J는 T의 잔에 술을 따랐다. 우연, 우연... 낄낄낄. 어쨌든 만나서 반갑다. 반갑다는 소리 빨리도 하네. 자, 건배.
- K가 네 소식 묻더라.
- 어어? 그 새끼가? 만났어?
- 응. 몇 주 전에 OB모임이었거든. 넌 안 나왔지만.
- 아, 아하... 바빠서... 그래서 뭐라고 했어?
- 나도 연락 끊겼다고 대답해 줬지.
J는 잠시 말없이 소면을 뒤져 골뱅이를 찾아 우물우물 씹었다.
- 왜, 서운하드냐? 새꺄.
- ....
- 새끼, 지만 바쁜 줄 알아. 나도 니 연락 없어서 서운했다 마.
- J.
- 서운한 줄 알면 니가 먼저 연락을 하든가... 맨날 TV에 나오니 모른척할 수도 없고, 에이 시벌. 오늘 니 와서 만나면 웃기겠다 싶어서 나왔는데 막상 보니까 한 대 갈겨 주고 싶으면서도, 니미럴.
J가 또 술을 한 잔 들이키는 동안 T는 식탁 가장자리에 얹혀 있는 J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마디마디가 잡혀 있지만 어딘가 조그맣고 가느다란 손. T는 무심코 그 손을 잡았다. 뭐야 너? J가 당황하며 손을 빼려 했지만 T는 놓아주지 않았다. 잠깐만. 닿은 손가락엔 느껴지지도 않는, 손바닥의 굳은살.
- 너 연습했구나.
J의 얼굴이 펌프질을 한 듯 붉게 달아올랐다.
- 갑자기 사람 손을 갖다가 뭐하는 거야?
- 오늘 너 스플리터랑 싱커볼 던졌지?
- 뭐....
- 고등학생 땐 스트라이크도 못 넣었잖아. 그래서 외야 가라는 얘기까지 듣고.
- 그건....
- 그런데 여기서 등번호 1번 달고...
- 야.
- 그러면서 왜 계속 타선은 3번 치는ㅡ
- 야!
J가 소리나게 술잔을 내려놓으며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기색에 움찔한 순간 손을 홱 빼낸 J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T는 입을 다물고 J를 바라보았다.
- 그 얘기 하지 말자.
- J.
- 아까 말했지. 우리 고등학생 아니라고.
- ...
- 착각하지 마라. 너야 야구빠따 움직여서 돈 버는 사람이지만 나는 아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J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옆에 있는 사람 몇이 인상을 쓰며 돌아보는 듯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T는 J를 마주본 채 침묵을 지켰고, J는 담배연기를 빨아 T의 코에 내뱉었다. 식탁에 팔을 걸치고 손가락에 담배를 끼운 채 한참 연기를 머금던 J는 재떨이를 잡아당겨 불을 껐다. 눈이 마주쳤다.
- T.
- 어.
- 그래 봤자 너한테 홈런 맞았다 나.
- ...
너한테 홈런 맞았다... 나. 자신의 목소리를 메아리질하며 J가 얼굴을 감쌌다. T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 * * * *
- 핸드폰 번호 줄게.
- 그러든가.
J는 다소 말수가 줄어든 것 같았다. 취한 것 같으면서도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번호를 입력하면서 흘긋 살펴본 전화번호부에는 T의 이름이 없었다. J의 휴대폰으로 자신에게 전화를 걸자 그의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었던 번호와는 다른 번호가 화면에 떴다. T는 J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 연락 자주 해.
- 그래.
- 가자.
T는 먼저 일어나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했다. J는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발끝으로 땅을 툭툭 치는 모양새가 그 때의 버릇과 똑같았다. 카운터 거울에 비친 J의 모습을 바라보던 T는 쓴 미소를 지었다. 지갑에 카드를 넣고 가게 문을 열자 딸랑, 하는 맑은 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번졌다. J는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 더 있을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고, T는 짤막하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 데려다 줄게.
- 웬일이냐. 나 기숙사 살 땐 먼저 말 안하면 우산도 안 씌워 주던 놈이.
J는 키득댔다. 그래도 좀 기분이 풀어진 것 같았다. 이젠 자동차가 있으니까 우산 씌워줄 필요는 없잖아. 재미없는 놈. 같이 우산 쓰는 게 얼마나 로맨틱하냐? T는 그에게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야, 옛날에는 자전거 태워 주더니 이젠 자동차 태워 주네? 너 아직도 자전거 못 타? 귀찮아. J는 조수석에 앉은 채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창문에 팔꿈치를 얹어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T는 시동을 걸고 페달을 밟았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자동차 바퀴의 감각이 의자를 통해 온몸에 전달되었다.
- J.
- 왜.
- 결혼은 했어?
이 타이밍에 그게 무슨 병신 같은 질문이야? 창밖을 바라보던 J가 T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T는 미동하지 않고 앞을 바라보았다.
- ....할 뻔 했어. 어쩌다 보니 날짜 잡고 파혼했지만.
- 그래.
- 너는 결혼 안 하냐? 영화배우 누구랑 사귀지 않아?
- 헤어졌어.
- 진짜? 그런 기사 안 뜨던데?
- 얼마 안 됐어.
- 아, 그래. 아쉽네. 예뻤던 거 같은데.
그리고 둘은 침묵했다.
오랫동안 차 안은 고요했다. 간혹 네비게이션이 말하는 쪽이 아닌 다른 길을 가리키는 J의 목소리만 물결이 퍼지듯 공기에 찰랑거렸다. 오래지 않아 J의 집 앞에 T의 차가 도착해 있었다. 중견 기업의 한 미혼 과장이 살기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깔끔한 아파트였다.
- 다 왔어.
내려야지, 라는 다음 말은 나오지 않는다. 여전히 팔꿈치를 창문턱에 올린 채로 밖을 멍하니 내다보는 J의 옆얼굴을 T는 눈을 끔뻑거리며 바라보았다. 차 안에 짙게 내려앉은 어둠이 얼굴에 그림자의 굴곡을 만들고 있었다.
- J.
- ....
- 아까 술집에서 했던 말은 미안해.
- 야. 그거 알아?
불쑥 J가 입을 열었다. T는 입을 다물었다.
너한테 가는 건 말이야.
꼭 뜬공인 줄 알고 잡으러 뛰어갔던 게 홈런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어.
뭔 뜻인지 알아? J가 돌아보았지만 T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계속 몰라라. 잘 가. 데려다 줘서 고마워. J는 크게 웃어보이고는 차문을 닫았다. 창문 너머로 아파트 건물 계단을 올라가는 J의 등을 한참 응시하던 T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손을 뻗어 조수석 등받이를 만지자 어렴풋이 남은 온기가 닿았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T는 자신이 울었음을 알았다.
* * * * *
또다시 몇 주가 흘렀다. T는 감독에게 허락을 받은 후 팀의 연습에 나가지 않았다. 그 동안 고등학교에 찾아가서 겨울 합숙을 하루 정도 지도해 주거나 고교 시절의 은사인 감독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등의 잡다한 일을 했다. J와의 연락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T가 전화를 걸면 늘 부재중으로 끝났고, 하루 뒤에 바빠서 받지 못했다며 문자연락이 오는 경우가 태반이었다.그럴 때면 T도 적극적으로 반응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드문드문 연락을 잇다 채팅창이 멈춘 지 한 주 정도 된 후였다.
T의 메이저리그행이 확정되었다. LA 다저스에서는 1150만 달러로 T와의 계약을 성사했다. 곧이어 기자들이 집 앞으로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기자를 싫어하는 T였지만, 이번만큼은 기자들의 카메라와 질문세례를 버텨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집 앞에서, 샤워를 막 마친 채 아무 옷이나 입고 수염도 깎지 않은 채로 기자라는 족속을 마주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T는 기자들과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팀 동료를 통해 자신의 출신 고등학교에서 정식 기자회견을 갖고 싶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곧 스포츠 신문란에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전국 야구팬들의 열띤 댓글들이 속속 달렸다.
- 그런데 T, 왜 굳이 학교에서 기자회견 하고 싶단 거야?
- 나한테 의미 있으니까.
아, 그래... 뭐라 딱히 받아칠 말도 없는 T의 대답에 동료들은 김이 푸시시 새는 느낌을 받으며 돌아서곤 했다.
기자회견 당일에 학교는 시끄러웠다. 당연했다. 야구부 졸업생 중에 성공가도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 선배님이 메이저리그 행 기자회견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야구부들은 매우 흥분한 모양인지 새벽부터 운동장 청소를 했다고 했다. 그 선수님, 아니 선배님은 솔직히 다른 건 몰라도 잘생겼잖아! 여학생 매니저들은 들뜬 표정으로 떠들어 댔다. 거창한 건 싫습니다. 그냥 학교 그라운드가 잘 나오게 찍어주세요. T는 짧게 말한 후 야외에 설치된 기자회견 부스로 들어갔다. 은사님으로서 함께 기자회견에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다며 T가 직접 부탁한 탓에 고교 감독님도 함께 부스로 들어왔다. 이미 부스는 기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양쪽이 트여 있어 어느 정도는 그라운드와 연습하는 선수들이 보였다. 어이 어이 인마 너 선배를 앞에 두고 공을 어따가 보내는 거냐! 어엉! 그라운드의 한 녀석이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T는 문득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잠시 고개를 돌려 눈을 비볐다.
- 자, 기자분들 다 모이셨나요?
- 그럼 이제 시작하죠!
- 네에, T선수는 준비되신 건가요?
- ...예.
- 다행이네요! 자 그럼 이번에 LA다저스에 1150만 달러로 이적 결정하신 T선수ㅡ 요즘 계 속 인터뷰를 하지 않으셔서 이렇게 기자들과 마주하는 것도 아마 오랜만이실 것 같은데 요, 지금 기분이 어떠신지-
천천히 카메라를 둘러보며 막 입을 열려던 T의 시선이 문득 부스 언저리의 그라운드 귀퉁이에 가 꽂혔다. T는 흠칫하며 손으로 책상 모서리를 꽉 움켜쥐었다.
J는 잠시 뒤 천천히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