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내 잘못이야.

 

 

 

 [케마이사] 불운의 의미

 - 이사쿠 이야기



 

 

 

 

 

 

아직도 기억나.

나랑 첫 '같은 방'이었던 그 애가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으로부터 꼭 6년 전, 우린 이 인술학원에 입학등록서를 냈고ㅡ 처음으로, 선생님과 같은 반 친구들을 만났어. 1학년 하반! 여러분 안녕! 드디어 닌자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그것도 함께할 친구들이 생긴다는 설렘은 어린 내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 했지. 게다가 우리 학교는 기숙사 제도라는 거야! 첫 방 배정을 받았을 때 많이많이 설렜어. 과연 나와 같은 방을 쓰게 될 아이는 누구일까? 하늘색 닌타마 교복을 입은 채 열어젖힌 문 안 방은 아늑했고 뒤따라 들어온 나의 첫 동급생 ㅡ 아직도 이름이 기억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ㅡ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어. 안녕? 이사쿠! 아까 다 같이 소개할 때 들었어. 젠포우지 이사쿠 맞지?

 

 

 

이사쿠, 내 이름이 처음 불렸을 때 가슴에 퍼지던 그 따뜻한 감촉. 난 그 감촉이 아직도 기억나.

 

 

교실에 앉아 책을 펴 공부하고. 표적에 수리검을 던져 맞히고. 우라산에 올라갔다가 밥을 먹으러 식당으로 가고.. 평화로운 나날이 늘 지속될 것만 같았어. 난 고작 열 살이었고, 선생님들은 엄청나게 커다랗고 든든한 사람들로 느껴졌었어.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는 더 그랬다는 뜻이야. 생각해 보니 그땐 도이 선생님이 안 계셨구나. 도이 선생님이 안 계신 학교라니 조금 이상하긴 하다. 어쨌든.

 

 

 

처음 같은 방을 쓰는 아이와는 더 많이 친해지는 게 당연하잖아. 난 그 아이와 꽤 많이 가까워졌어. 지금 란타로군, 키리마루군, 신베군이 친해진 것처럼.. 넌 그땐 나랑 꽤 먼 방이었다고 기억하는데.. 그래서 그땐 너랑 내가 그렇게 많이 친하지 않았나 보다. 아아, 삐지지 마. 지금 안 그러면 된 거지 뭐. 하여간 난 그 아이랑 매일같이 밥을 함께 먹었고 함께 놀았고 함께 수련했고... 아하, 생각난다. 몬지로랑 센조는 그 때부터 같은 방이었는데, 그 땐 몬지로가 거의 지금 1학년 로반 애들 수준으로 말이 없었어. 믿겨지니? 하하하. 지금 성격은 거의 센조랑 싸우면서 만들어진 거라니까. 하긴 그땐 네가 나보다 더 몬지로랑 친했겠다.

 

 

 

어쨌거나 그런 날들이 지속됐어. 첫 위원회를 뽑았을 때 글쎄 난 네가 알다시피 보건위원회에 당첨! 됐고, 하반 아이들은 모두 "이사쿠 불운해~" 하고 놀렸었지. 그때 불운이 뭐야? 하고 물었던 기억이 나. 운이 없다는 뜻이랄까, 애들은 장난식으로 가르쳐 주었고 내 같은 방 짝꿍 아이는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나를 토닥여 줬어. 그런 건 다 미신일 뿐이라고... "네가 정말 불운하면 그렇게 실기수업을 잘 따라가겠어? 걱정하지 마, 이사쿠." 하하.. 그래. 그땐 그런 줄 알았지.

 

그런 날들이 지속됐을 때 말야. 그래. 그 일이 일어난 거야. 너도 기억하고 있을 거야. 우린 겨우 열 살이었으니까. 제발, 그 애 이름을 기억하려 하지 마. 날 괴롭히지 마.

 

 

 

 

처음으로 눈앞에서 보게 된 친구의 죽음.

 

 

 

내 앞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아이는.. 내 같은 방 아이였어.

내게 날아오는 총알을 막아 주려다 자기가 맞은 거야.

그게 말이 돼? 우린 고작 열 살이었다고.

죽음을 이해하기엔 난 너무 어렸고,

비어 있는 방에서 혼자 있기엔 난 너무 여렸어.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네가 알까?

 

 

나 때문이야.

내 불운이 옮겼던 거야.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잖아.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불운... 그 불운이 한 번도 날 죽인 적은 없었단 말야.

그런데 어떻게 나도 아닌 내 옆 사람을 죽여?

그건 말이 안 되잖아. 그렇잖아.

 

그땐 그냥 넘길 수 있었어.

하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빈 방에 앉아 있노라면

너무 무서워져서,

쫓기듯이 도서실에 가보면 늘 쵸지가 있었거든. 꼭 기다린 것처럼.

그럼 내게 말을 걸어주는 쵸지 옆에 앉아서 잠깐 무서움을 잊다가

쵸지네 방에 가서 함께 잠을 청하곤 했지.

그나마 그게 나에게 위로가 됐어.

왜 내 방에 올 생각 안 했냐고 묻진 마.

그땐 너랑 그렇게까지 친하진 않았어.

삐지지 말구.

 

 

 

 

 

그리고 우린 2학년이 됐어.

 

그 일이 점차 학교에서 잊혀질 무렵 우린 방 편성을 다시 했고,

난 다시 새로운 방 친구를 만났지.

그때의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친해져 있었으니까

누가 한 방이 되든 크게 상관 없었지.

 

 

그리고 또 평화로운 날들이 계속되다가...

 

 

 

 

 

또 그 일이 일어난 거야.

 

악몽의 반복.

 

낭자한 선혈과

 

또다시 비어버린 방.

 

 

 

 

나 때문이야.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남들은 한 번 겪기도 힘든 일이 나한테 2번이나 일어날 리가 없어.

 

 

 

 

정말 내가 그렇게 불운한 거야?

내가 그렇게까지 운이 없을 수 있는 거야?

 

 

기억나?

그 뒤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3학년 때도.

4학년 때도.

5학년 때도.

 

 

똑같았어.

 

똑같은 일이 계속 일어났다고.

 

 

 

 

새로운 방 친구가 생겼고

 

그 아인 그 학년이 넘어가기 전에 죽었어.

 

 

 

나 때문이야.

안 그러면 어떻게 내 방에서만 그런 일이 일어나?

 

이건 내가 불운하기 때문인 거야.

내 불운이 내 방에 있는 사람까지 불운하게 만드는 거야.

너무 불운해서, 너무너무 불운해져서...

죽어버릴 만큼.

 

 

 

 

 

물론 그 해에 죽은 사람이 내 방 친구만은 아니었어.

우린 많이... 죽으니까...

아무도 나에게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

이사쿠가 불운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왜 내 귀에는 들리는 것만 같았을까.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밤마다 같은 방이었던 친구들이 꿈에 나왔어.

 

 

그렇게 많이 죽었고

그만큼 많이 떠났고.

 

그렇게... 우리 둘만 남게 된 거야.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너와 내가.

 

 

 

 

 

너무 무서워.

 

 

 

 

대답해줘, 토메사부로.

 

넌 내 옆에서 살아 있을 수 있니?

 


 

 

 

 

 

 

왜 네 잘못이야?

 

 

 

[케마이사] 불운의 의미

 - 토메사부로 이야기



 

 

 

 

 

 

아직도 기억나.

그 아이의 시신을 앞에 둔 네 표정이 어땠는지.

 

지금으로부터 꼭 6년 전, 우린 이 인술학원에 입학등록서를 냈고ㅡ 처음으로, 선생님과 같은 반 친구들을 만났어. 1학년 하반! 여러분 안녕! 드디어 닌자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그것도 함께할 친구들이 생긴다는 설렘은 어린 내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 했지.... 가 문제가 아니라, 난 사실 싸움꾼들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지. 하하. 뭣도 모르는 허세로 똘똘 뭉친 열 살의 나는 내가 가진 힘을 꼭 시험해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그땐 네 얼굴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어. 닌자같지도 않게 생겨서는, 닌자같은 성격도 아닐 것 같다. 라는 게 널 처음 본 내 인상이었거든. 한번 슥 보고 걍 잊었지.

 

 

 

난 이래뵈도 살던 마을에선 힘깨나 쓰던 애라서 금세 하반 아이들과 차례로 힘겨루기를 하게 됐고, 역시나답게 난 탑을 먹었지. 글쎄 네가 기억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때 너와는 승부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사실 네가 싸움에 잘 응해주는 성격은 아니잖아. 그러다가 이반의 몬지로와 어쩌다 붙게 됐는데, 느낌이 오더라고. 아 이 자식은 내 필생의 승부사다. 반드시 이겨주고야 말겠다. 흐흐! 아, 논점은 이게 아니고. 미안해, 딴소리 해서.

 

 

위원회 뽑았을 때 말야? 아하, 그때 내가 뭘 뽑았는지는 잊어버렸어. 지금의 용구위원이 훨씬 더 중요하니까. 하지만 넌 잊어버리지 않고 있어. 6년 연속 보건위원 당첨의 주인공을 잊어버릴 수가 있나. 그때 네가 보건위원에 혼자 뽑혔을 때, 주위 애들이 "이사쿠 불운해!" 하던 것 다 기억나. 그때 네 표정이, 풉, 정말 귀여웠거든. 이건 칭찬의 의미야. 제비 하나 뽑아들고 주위 반응에 당황해서 난감해하는 얼굴이라니! "불운하다는 건 그냥 운이 안 좋다는 거야." 그렇게 장난식으로 말해준 거, 나였잖아. 그런 것도 기억을 못해, 바보가.

 

...... 그 이후로 내가 너한테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넌 모르겠지? .... 그래 모르고 있네. 나하고 덜 친했네 어쨌네 그런 소리 하는 거 보면. 넌 그렇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내가 그날 이후로 너한테 다가가려고 얼마나 남모르게 애를 썼는데.... 너 선배님들 함정에 빠지는 거 구해준 게 누구냐? 도서실 갔다가 책 쏟아지는 데 책장 일으켜 세운 게 누구야? 기억해 봐. 니 옆에 항상 누가 있었는지. 하긴 넌 늘 네 방 친구와만 다녔었지. 어느 날 네가 혼자 우물가에서 양치질하다가 우물에 빠질 뻔했을 때 내가 구해줬잖아. 그때 "고마워, 토메사부로" 라고 말하던 네가 난 기억이 나는데 넌 기억을 못한다고? 에휴, 딸자식 키워봐야 아무 소용 없다더니... 아니 네가 내 딸자식이란 건 아니고. 넌 딸이 아니라........음...... 모, 몰라. 따라다닌 거 아니냐고? 그, 그런 적은 없어! 솔직히 너 돌봐주는(?) 시간보다 몬지로랑 싸우는 시간이 더 많았으니까, 착각하지 마.

 

 

 

 

아, 아무튼. 어쨌거나 네 말대로 그런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되다가, 기억나. 우리의 동맹 성과 전쟁을 하던 그 성에 잠입해서.. 임무를 수행하려다가. 너를 향한 총구를 봤어. 내가 뛰어들기도 전에 네 그 같은 방 친구가 뛰어들더라. 탕! 하는 소리가 났고 걔는 엎어졌지. 나도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어. 네 같은 방 친구이기 이전에 같은 하반 학생이었잖아. 지금 1학년 하반 애들이 당장 헤이다유나 단조가 죽는 걸 눈앞에서 본다고 생각해 봐. 산지로나 토라와카 뿐만이 아니라 전체가 멘붕할 거 아냐. 똑같은 이치지.

 

 

 

그런데 네 얼굴은 정말 장난 아니었어.

 

저거 저러다 쓰러지면 어쩌지.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내 머릿속은 그런 생각들로 가득했어.

 

우린 고작 열 살이었고, 그 충격을 혼자 감당하기에 모두 약했어.

넌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난 황급히 달려가 너를 안아들었어.

 

 

 

이사쿠가 정신을 잃었어. 빨리 물수건 좀 가져와줘!

 

 

 

 

그리고 그 총을 쏜 병사는 선생님들이 죽였지.

 

인술학원의 법칙, 교사와 학생은 웬만해선 다른 닌자나 사무라이를 죽이지 않지만,

단 하나의 예외. 우리 학생을 죽였을 경우, 논외 없이 사살.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1학년 때부터였을 거란 생각은 미처 못 했어.

 

친구를 잃었기에 당연히 상심이 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로 네가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었을 줄은....

 

 

그때로 돌아가서 널 안아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넌 내 방에 올 생각도 못 했겠지.

넌 그때 내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랐을 테니까...

쵸지가 있어줘서 다행이다.

 

 

 

 

 

 

 

그렇게 지나갔던

 

2학년,

3학년,

4학년,

5학년까지.

 

 

 

 

많은 아이들이 죽었고

 

많은 아이들이 떠났어.

 

 

 

너와 같은 방이었던 아이들이 모두,

1학년 때와 같은 방식으로 죽었다는 것

나는 기억하고 있어.

어떻게 기억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그때마다 너는 그 앞에서 정신을 잃었고

그때마다 너를 안아든 것이 나였는데....

 

 

 

 

 

 

단 한 번도 그게 네 탓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남들은 한 번 겪기도 힘든 일을 다섯 번이나 겪은 너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외람된다는 생각 안 해?

몬지로도, 쵸지도, 코헤이타도, 센조도 같은 생각일 거야.

 

 

 

응. 기억나.

그 뒤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똑같았어.

 

똑같은 일이 계속 일어났지.

 

 

 


어느 새 정신을 차려보니

 


끝까지 살아남아 있는 건 우리 둘이었더군.

 

 

 

 

 

하지만 그건 네 방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야.

이 인술학원에서 죽어간 아이만....

 

제발, 우연이라고 생각해줘.

네가 우연이라고 생각하면 우연이 되는 거야.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마, 제발, 이사쿠.

 

네가 시간이 지날수록 자책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어.

그랬으니까 우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하지만 내가 네 감정을 아는 만큼

내 감정도 한 번만 들어 주지 않을래?

오, 제발. 울지 말고.

 

 

 

내가 한 생각은 오직 하나였어.

 

 

 

 

내가 너와 같은 방이 되어준다면

그 끔찍한 연쇄작용을 끊어줄 수 있을 텐데.

난 결코 죽지 않고 살아서,

그 다음 해에도, 그 다다음 해에도....

같은 방에서 너를 반겨줄 수 있을 텐데....

 

 

 

 

다행히도 6학년이 되던 날 너와 한 방에 들어갔을 때

드디어 너를 위로해줄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도 기뻤어.

 

네 옆에서 끝까지 살아 있어 줄게.

 

 

 

네 옆에서 끝까지 살아 있어 줄 수 있는 내가,

가장 마지막이 된 건 왜였을까.

 

귀찮게 말야. 안 그래?

 

 


  

 

 

 

 

 

 

 

 

 

 

 

 

 

 

 

 

 

 

 

 

 

 

 

 

 

 

 

 

 

 

 

 

 

 

 

 

 

 

 

 

 

 

 

 

 

 

 

 

 

 

 

 

 

 

 

 

 

?

 

 

 

 

 

 한  

 

 

 

 

 

 

살았다 싶었던 맨 마지막 순간에

 

마지막의 마지막에

 

 

 

 

 

 

 

 

 

 

 

 

 

 

 

 

 

 

 

 

 

 

 

 

 

 

 

 

 

 

 

 

 

 

 

 

"토메사부로! 토메사부로! 내 목소리 들려? 제발, 제발, 토메사부로! 토메사부로..."

 

 

 

 

 

 

 

 

 

 

 

 

 

 

 

.

 

 

 

 

 

정말이지, 불운하다니까.

 

 

 

 

 

 

 

 

 

 



그니까 싫다구요, 네? 아니 잠깐이고 뭐고 무조건 싫다니까? 내가 이렇게 싫어하는 거 봤어요? 아 나 미치겠네. 나 이러다가 진짜 확 넘어뜨려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알아서 해요. 아, 그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좋아. 그럼 나한테도 생각이 있다 이거야.

 

 

 

 

야마다 리키치 X 도이 한스케 ]

도이 선생님의 맞선의 단

 

by. 카루린다카렌

 

 

 

 

 

 

리키치는 걸음을 빨리했다. 오랜만에 편안한 기분으로 느끼는 시장터의 공기는 느근하면서도 달큰하게 그의 몸을 휘감아 돌았다. 좌판에 앉아 생선을 파는 젊은 여인네 둘에게 눈을 한번 찡긋해준 후 돌아서자 그녀들이 킬킬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내가 인물은 어디 가서 빠지지 않지. 기분이 흐뭇해진 리키치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산등성이를 힐끗 바라보고는 바로 옆길로 돌아섰다. 장터에서 도이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닌술학원에 며칠간의 휴일이 있었던 터라 도이 선생님이 키리마루와 함께 집에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였다. 마침 내일이 휴일 마지막 날이었고, 리키치 자신도 의뢰받은 일을 끝내고 아버지도 볼 겸 학원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라 하룻밤 도이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다음날 함께 닌술학원으로 떠날 작정이었다. 세 번째로 모퉁이를 돌자 작은 시내를 사이에 두고 있는 도이의 집이 보였다. 사뿐사뿐히 걸어가는 리키치의 입술 사이에서 엷게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도이 선생님ㅡ"

 

 

 

 

활기차게 열어젖힌 문 안에서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창문에 불이 꺼진 것을 발견하자 리키치의 얼굴이 이내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현관으로 들어서 보니 댓돌에는 신발이 없었고, 마루도 식어 있었다. 화로는 끈 지 오래되지는 않았는지 여느적 가늘게 연기가 소폭 피었다. 이부자리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한비짝에 놓여 있는 것을 보자 리키치는 미간을 찌푸렸다.

 

- 어디 간 거지?

 

 

순간 엄청난 수의 도적떼가 들이닥쳐 도이와 키리마루를 잡아가는 장면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르자 리키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등 뒤의 칼을 뽑아드려고 했지만, 그렇다면 이부자리가 이렇게 가지런할 리가 없다며 스스로를 달랬다.

 

 

 

"거기 누구야?"

 

 

리키치는 황급히 뒤를 돌았다. 잠깐이나마 아까 한 상상이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리키치는 익숙한 얼굴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집주인 아저씨였다.

 

 

 

"아, 아저씨. 오랜만이네요."

 

"리키치 군! 정말 오랜만이네. 그런데 웬일이야? 한스케 만나러?"

 

"네. 도이 선생ㄴ...아니 한스케상 보러 왔는데 안 계시네요...? 어디 가셨어요?"

 

"오늘 아침에 키리마루랑 나갔어. 길이 엇갈렸나 보지?"

 

"....그런가 보네요."

 

 

 

날짜를 잘못 알았나? 리키치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자기가 착각했던 도이 선생님이 착각했던, 하루이틀 정도의 오차야 없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이가 해주는 생선구이를 먹지 못하게 됐다는 생각에 이르자 리키치는 풀이 죽었다. 부러 생선가게를 들르지 않은 게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그렇다면 오늘 밤은 여기서 묵을 이유가 없어졌으니 땅거미가 완전히 지기 전에 닌술학원으로 서둘러 달려갈 참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리키치가 마루에 걸터앉아 다시 신발을 묶고 있는데 주인집 아저씨가 뭔가 쭈볏쭈볏하더니 리키치에게 말을 걸었다.

 

 

 

"저, 리키치 군. 지금 한스케 보러 가는 건가?"

 

"아, 네. 말하자면? " ( 껴안으러 가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리키치는 생각했다.)

 

"그럼 한스케한테 말 좀 전해 주게. 하루코쨩이 한스케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으니깐, 한번 더 만나서....."

 

"뭐라고요????????"

 

 

 

 

리키치는 소리를 쳤다. 주인 아저씨가 놀라 뒤로 넘어졌다. 궁둥이를 찧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 어떡하냐고 왱알왱알대며 면박을 놓는 주인아저씨 앞에 리키치는 얼굴을 들이대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음.에.들.어.한.다.고.요?"

 

"...그, 그래!!!! 갑자기 웬 과민반응이야?"
 

"누가 누구를?"

 

"아 하루코쨩이 한스케를!!!!! 아니 왜 승질을 내냐구, 자네도 선 볼 나이라 그래??"

 

"ㅁ...뭐라구요??? 선???"

 

"나 참, 내가 왜 이걸 리키치 군한테 설명하고 있어야 되는지 당최 모르겠네. 하루코쨩이랑 한스케가 선을 봤는데 하루코쨩이 한스케가 맘에 든다고 했다고. 한스케도 이참에 노총각 신세 좀 벗으라고 동네 할머니들이 주선해준 모양인데 한스케는 어땠는지 몰라도ㅡ"

 

"알았어요. 거기까지. 그 이상은 듣지 않겠어요. 말해줘서 고마워요, 아저씨."

 

 

 

 

 

리키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을 떼더니 네 발 달린 늑대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주인 아저씨가 뭐라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학원 문 앞을 비질하고 있던 코마츠다는 우라야마 뒤로 해가 완전히 넘어간 것을 확인하자 품 안에서 자물쇠를 꺼냈다. 학원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내일까지 휴일인지라 학교는 많이 한산했다. 학교에 있는 사람은 원장 선생님과 6학년들, 5학년 사부로, 4학년 슈이치로, 3학년과 2학년들은 전부 집에 가고 없었고 1학년들은 이반의 히코시로, 로반의 후시키조, 하반의 쇼자에몽과 단조, 그리고 키리마루가 도이 선생님과 함께 와 있었다. 선생님들은 안도 선생님과 노무라 선생님들 제외하면 전원이 휴일에도 집에 가지 않고 근무 중이었다. 코마츠다는 빗자루를 한쪽에 세워 놓고 빗장에 자물쇠를 걸었다.

 

"!!!!!!!!"

 

 

 

 

그때 밖에서 손 하나가 문틈으로 불쑥 끼어들어오자 코마츠다는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리키치인 것을 확인하고 나서도 코마츠다는 놀람을 진정하지 못했는지 우는 소리를 냈다. 리키치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다 가슴을 들썩이고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거친 호흡을 연이으며 리키치가 손을 내밀자 코마츠다는 우는 소리로 입문표에 사인해주세요ㅡ라고 말하며 입문표를 내밀었다. 사인을 끝낸 후 겨우 진정된 듯한 리키치에게 코마츠다가 자고 가시는 거냐고 묻자 리키치는 대답 대신 짧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야마다와 도이의 사무실로 날래게 뛰어갔다. 코마츠다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

 

 

사무실의 문을 열어젖히기 무섭게 리키치는 으르렁대며 야마다 선생님을 불렀다. 리키치의 깜짝 등장에 놀란 야마다와 도이는 당황한 얼굴로 리키치를 일단 들이고 앉히려 애썼다. 리키치는 두 달간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야마다의 협박에 일단 진정하고 자리에 앉았다. 도이가 차를 내주자 리키치는 도이를 향해 인상을 썼다. 도이는 흠칫했다.

 

 

 

"그래. 니가 이 늦은 밤에 무슨 일로 여기 쳐들어왔는지 들어나 보자."

 

"아버지. 대체 왜!!!! 도이 선생님을!!!"

 

"어? 나?"

 

"선을 보도록 내버려두신 겁니까!!!!!!!!!!"

 

 

 

 

리키치의 쩌렁쩌렁한 고함이 울려퍼지자 야마다는 미묘한 눈빛으로 도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도이는 잘못한 거 아는 10살짜리 소년마냥 움찔 돌아앉으며 눈길을 피했다. 잡아먹을 듯한 리키치의 형형한 눈이 야마다에서 도이를 향했다. 도이는 리키치와 눈이 마주치자 그만 헤, 하고 웃어버렸다. 그 눈웃음이 이완제 역할을 했는지 리키치는 얼굴을 붉힌 채 눈을 꽉 감더니 하아, 하고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어보였다.

 

 

 

"이봐 도이 선생, 선 봤어?"

 

"아....제가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나 보네요. 하하하."

 

"지금 깜빡했다고 하면 다에요, 선생님!!!!!"

 

"아하하, 리키치 군, 미안해. 미안. 미안해."

 

"하.... 저 진짜 이러다가 닌자 일 때문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홧병 나서 죽을지도 몰라요."

 

"아니 그 선은 어떻게 보게 된 건데?"

 

"그게.... 동네 할머니들이.... 하하하. 제가. 너무 나이가....많은데 숫총각... 인게... 가엾다고. 하하. 하하하...."

 

"아니 선생님. 왜 숫총각 아니라고 말을 안 했어요?"

 

"어? 어?;;; 내가 무슨 숫총각이아니라고....그래?"

 

"하. 나랑 한 건 대체 뭔데ㅡ읍!!!!읍!!!!!으그느으으!!!!!"

 

 

 

도이는 웃는 얼굴을 한 채 손을 뻗어 리키치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두 사람 관계를 (리키치가 하도 막무가내라 어쩔 수 없이) 야마다가 인정했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있는 앞에서 남사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건 현명하지 않은 처사일 듯 싶었다. 아무리 살아있는 보살, 현존하는 부처인 야마다라고 하더라도 이미 둘 사이에 몸이 오갔다는 말을 들으면 충격받고 쓰러져 버릴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도이는 리키치에게 바짝 몸을 숙여 귀에 대고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이따가 방에 둘이 가서 얘기하고 여기선 조용히 해. 리키치는 잠깐 눈썹을 찌푸려 보였으나 도이가 귓바퀴에 살짝 입술을 문지르자 잠잠해졌다. 도이는 웃는 얼굴로 리키치에게서 떨어져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뭔데...?"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야마다 선생님."

 

"(의심의 눈초리)"

 

"그,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리키치 군은?"

 

"....그 주인집 아저씨가 전해 달랍디다. 하루코쨩이 한스케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으니 한번 더 만나달라고!!!!!!!!"

 

 

 

리키치는 생각하니 다시 열불이 치솟는 듯 고개를 든 채 허리를 숙이고 양 팔꿈치를 양반다리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마음에 들었대...?"

 

"아주!!!! 쏙!!!! 미친듯이!!!!!! 좋아서 죽어버릴만큼!!!!! 맘에 들었나 봅디다!!!!!!!!!!!"

 

 

 

 

도이는 피식 웃었다. 이러나 저러나 어린애인 건 어쩔 수가 없다.

 

 

 

"리키치, 내가 왜 오늘 하루 일찍 왔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아 맞다. 나 오늘 선생님네 집에 하룻밤 자러 갔었는데 없어서 우울했다고요. 안 그래도."

 

"내가 내일 돌아간다는 거 알면 할머니들이 그 하루코 씨랑 하루 내내 데리고 다닐까 봐 무서워서 그랬다."

 

"......"

 

"아무리 나라도 말이지~ 그런 건 못 견디겠단 말이야."

 

".......그래서 앞으로 전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코씨는 안 만날 거에요?"

 

"엉?"

 

"앞으로 전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만날 거냐고!"

 

 

 

도이는 순간 눈을 크게 뜨더니 콧잔등을 찌푸렸다.

하루코를 만나고 만나지 않고는 도이의 생각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엄.......리키치.....그게 있잖아."

 

"뭐요? 어디 한번 대답해 봐요."

 

"내가 당연히 하루코씨의 마음을 받아들이진 않겠지만, 하루코씨가 나를 좋아하든 말든, 근데 할머니들을 계속 피해다니는 건 엄청 어렵거든...... 그리고 나 거기서 계속 살려면 할머니들이랑.....음..... 잘 지내야 하는....것도 있고.......그래서 진짜로절대로무슨마음이있어서만나는건아니고할머니들이보라고하면한두번정도는정말어쩔수없이ㅡ"

 

"싫어. 절대로 싫어. 진짜 절대로 안 돼요. 아니 잠깐이고 뭐고 무조건 싫다니까? 나 또 이런 얘기 들려오면 그땐 진짜 일낼줄 알아요. 여자고 뭐고 없어. 닌자가 그런 거 봐주는 거 봤어요? 아님 내가 이렇게 싫어하는 거 본 적 있어요? 있으면 말해 봐. 그럼 내가 1000분의 1정도는 양보할 의향이 생길락 말락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것도 같으니까."

 

 

 

 

야마다는 아들의 랩 실력에 혀를 내두르면서 마음 속으로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야마다는 몸을 일으키더니 도이와 리키치를 한꺼번에 방 안에서 끌어냈다. 그리고는 근처를 지나가던 쇼자에몽에게 (쇼자에몽이 어려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이 선생님과 리키치 형을 저기 저 보이는 건물까지 바래다 달라는 이야기를 했다. (4학년에 다니던 아이가 자퇴하고 쓰지 않는 방이었다) 그들을 내보내고 문을 잠그면서 야마다는 진심으로 저 두 사람은 자기가 둘이서 무엇을 어디까지 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궁금해졌다.







- The last party


Pix




조금 테츠쥰

약간 쿠라료














찰랑거리는 분홍 빛깔 머리칼이 그늘 속을 황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살짝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눈에 띄는 분홍 머리카락을 애써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던 그는 두리번거리며 어떤 문 앞에 멈춰 섰다. 문에 달린 창이 어둑한 걸로 보아 안에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아마 확인을 해야 했을 것이다. 분홍 머리는 문고리를 잡아당겨 살그머니 문을 열었다. 안을 들여다보던 그는 입모양을 오므려 바람 소리를 냈다. 아무도 없어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무리의 그림자들이 첩보대원들처럼 나타나 문 안으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졌다. 마지막 그림자가 들어가자 문이 닫히며 찰칵 하고 잠겼다. 







"와, 진짜 심장 쫄려 죽는 줄 알았네!!!!"



"아무도 못 본거 확실하지???"






차례로 한 마디씩 뱉는 쿠라모치와 미유키였다. 절대 아무도 못 봤어요, 라고 대답하며 하루이치는 방에 불을 켜고 토죠에게서 건네받은 종이로 문에 달린 창을 가렸다. 방이 환해진 뒤에야 비로소 이 안 쓴 지 오래 된 회의실의 내부가 다소 어질러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한숨을 쉬며 저마다 들고 있던 꾸러미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좀 치우고 해야겠네. 료스케가 중얼거린 것과 사람들의 눈이 방 한켠의 청소함에 가 닿은 것은 거의 동시였을 것이다. 누구보다 빠른 동작으로 청소함에서 빗자루를 꺼낸 사와무라는 후루야와 카네마루에게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하나씩 던져 주었다. 하루이치의 손에는 조금 지저분한 기름걸레 막대가 들렸고, 토죠는 엎어져 있던 쓰레기통을 일으켜 세워 미리 가져온 쓰레기봉투를 끼웠다.






"뭠까!!! 후배들이 솔선해서 청소를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슴까 미유키 카즈야!!!!"


"호오, 방금 그 발언은 2학년 전체에 대한 저격이냐 사와무라?"


"치, 치타선배 그런 건 아니ㄱ, 으악! 발로 차지 마십쇼!!!"


"그래~ 후배들을 본받아라 이거구나? 뭐, 우리도 청소 같이 하는 게 좋겠지~"


"형님, 그런 뜻이 아님다!!!! 오해하시면 안됨다!!!!"


"하하, 쌤통이다 사와무라~"


"웃지 말지 말임다 미유키 카즈야!!!!!"








정신없이 엉켜 있는 책상와 의자를 방 한쪽으로 치우는 것은 미유키와 쿠라모치, 그리고 시라스가 맡았고 노리와 조노는 물티슈로 책상 하나를 깨끗이 닦은 뒤 아까 사람들이 내려놓은 꾸러미를 차곡차곡 그 위에 올려놓았다. 료스케를 비롯한 다른 3학년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가위로 색종이나 각종 치렁치렁한 것들을 자르고 있었다. 마스코가 엉뚱하게 가위질할 때마다 탄바가 한숨을 쉬며 자세를 고쳐 주었다. 자자자자 선배님들 엉덩이 좀 들어주십쇼!!!!! 빗자루를 들고 돌격 앞으로를 시전하는 사와무라 덕에 3번 정도 자리를 옮기고 나서야 비로소 대강의 청소를 마치고 다른 사람들도 색종이 자르는 데 합류할 수 있었다. 물론, 번번히 재료들을 조각조각 내 못 쓰게 만드는 사와무라나 가위를 고장내는 후루야 대신 카네마루가 울며 겨자 먹기로 3인분을 해야 했다는 것은 이미 몇 시간 전에 토죠가 예언한 바 있는 사실이었다. 한참을 자르고 붙인 뒤 만들어진 엉성한 장식물들을 보며 그들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매달기만 하면 되는 거죠? 벌써 밟고 올라설 의자를 들고 있는 쿠라모치가 입을 열자, 미유키 역시 그 옆에서 풀을 집어들며 딱히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그런데 테츠 선배는 언제 오시는ㅡ"






똑똑.








순간 모두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정적이 흘렀다. 아, 안되는ㄷ!!!!!! 조용히 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지르는 사와무라의 입을 카네마루가 틀어막자 하루이치가 황급히 문 쪽으로 다가가더니 조심스럽게 문을 가린 종이 틈을 벌리고 들여다보았다. 










"크리스 선배ㅡ"


"아 깜짝이야 진짜!!!"


"간 떨어질 뻔 했잖아요오ㅡ"


"크리스 너 사람 놀래키는 데 뭐 있구나?"








괜찮다는 표정을 하고서 문을 열어준 하루이치의 뒤에는 크리스가 서 있었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 마디씩 하는 사이 크리스는 잔잔히 웃으며 커다란 케이크가 담긴 상자를 내밀었다. 사오라고 한 케익이 맞는지 모르겠군. 케이크를 받아든 탄바가 물었다. 누가 사오라 그런 건데? 이사시키가. 테츠가 이걸 좋아한다고 하던데. 맞는지 확인을 받아야겠는데.. 이사시키 어딨어? 지금 테츠랑 같이 있어. 그렇군. 크리스는 점퍼를 벗어 한쪽 의자에 걸어 두고는 방을 꾸미는 데 동참했다.

어느 새 방 안은 꽤나 (1년 365일 야구만 하는 남자 고등학생들 기준으로는)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센스가 좋은 토죠가 솜씨 있게 데코레이션 한 양초에 불을 붙이자 분위기도 한껏 파티 느낌이 났다. 료스케는 케이크 상자에서 폭죽을 떼어 크리스와 탄바에게 들려 주었다.






"이제 테츠 부르면 되겠지?"


"지금 시간 몇 시야?"


"9시 23분이요."


"이사시키가 언제 데리고 온다 그랬는데?"


"시간은 안 정했어. 내가 전화한다 그랬거든. 누구 우리 중에 휴대폰 갖고 있는 사람 있어?"


"사와무라, 폰 내놔 봐."







쿠라모치의 폭력(?)에 핸드폰을 뺏긴 사와무라가 하루이치와 토죠에게 토닥임을 받는 동안 료스케는 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두가 휴대폰을 둘러싸고 스피커로 삐져나오는 신호음을 듣고 있는데 몇 번 가지 않아 찰칵 하고 수신이 되었다.






"여보세요. 쥰 이제 테ㅊㅡ"


「여보세요?」







드물게 료스케의 입에서 헉하는 소리가 났다. 왜 그러세요?! 미유키가 묻자 료스케는 당황한 얼굴로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사와무라? 이거 사와무라 휴대폰 아닌가? 번호가 사와무라인데.」


"....테츠, 나 료스케야. 지금 뭐해?"







쿠라모치도 헉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가렸다. 료스케는 가만히 있어보라는 손짓을 하고서 휴대폰에 귀를 기울였다.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료스케를 바라보고 있었다.







「료스케? 넌 지금 어디 있는데?」


"나 그냥 있지. 근데 왜 니가 받아, 쥰이 아니고? 둘이 같이 있어?"


「쥰 지금 화장실 갔는데.」





이런 x박색끼!!!! 료스케는 입모양으로 거친 언사를 읊조리며 심호흡을 했다.







"아... 그래? 그렇구나~ 그럼 쥰 오면 내가 전화했다고 전해ㅈㅡ"


「 (야!!!! 너 왜 내 전화를 받고있어!!! 죽을래!!!!!) 어... 지금 쥰 왔어. 아 쥰, 잠깐만, (빨리 안 내놔!!!! 죽고싶냐!!!!!) 잠깐만 알았어, 주면 되잖아. 」


"...."


「후....하.....여보세요.」


"....쥰. 세상 하직하고 싶지?"


「....미안.....」


"미안한거 알면 지금부터 자연스럽게 테츠 이쪽으로 데리고 와. 들키면 다 니탓이죠?"


「.....」


"대답해?"


「....예에.....」







탁.




빡친 표정으로 료스케가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탄바는 휘청거리다 근처 의자에 쓰러졌고 미유키는 이마를 짚었으며 카네마루는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래도 다행히 다 말하기 전에 테츠 선배가 말해서 다행이네요. 그러니까 말이야. 쥰 오면 내가 반 죽여놓을 거야.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지리한 시간이 흐른 뒤 - 쿠라모치가 다시 전화해 보겠다며 사와무라에게서 폰을 뺏은 것이 두 번, 케이크를 몰래 먹으려고 하는 마스코를 잡은 것이 세 번, 하루이치가 종이 틈으로 밖을 내다본 것이 열여섯 번, 후루야가 촛불을 실수로 꺼트린 것이 두 번 - 10시가 거의 다 됐을 무렵 다시 한 번 밖을 내다본 하루이치가 다급히 소리를 낮추었다.






"토죠 군, 전등 꺼 줘! 폭죽! 폭죽 준비해요! 형, 케이크 꺼내!"







즉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사이 투벅한 발걸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하루이치가 다시 한 번 밖을 내다보고는 폭죽을 든 크리스와 탄바에게 고갯짓을 했다.





"쥰, 갑자기 왜 그래. 여기 뭐가 있다고."


"시꺼, 따라오기나 해."


"내가 아까... 그래서 화난 거야?"


"아 화 안났다고!!! 그런거 아니여!!!"


"근데 왜 또...여기 불도 하나도 안 켜져 있고..."


"아아아아아아 됐어!!! 됐으니까 그냥 따라와!!!!"


"쥰... 잠깐만...안돼?"


"아 xx!!!! 야!!! 죽고싶냐!!!! 읍!!! 우읍!!!!"






진짜 죽여버릴까. 료스케가 중얼거리자 쿠라모치는 등에 쭈볏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기...더 못듣고 있겠는데 그냥 이쪽에서 문 열면 안될까요? 토죠가 말하자 크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한참 밖에서 투닥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멎었다. 알았으니까 일단 문 열어. 열면 일단 다 해줄게. 라는 쥰의 목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철컥 하는 소리를 냈다.








"여기에 뭐가 그렇게ㅡ"




"생일 축하합니다 캡틴!!!!!!!!!"





폭죽이 터졌다. 퍼벙, 하는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쏟아진 종이 장식들이 테츠를 향해 쏟아졌다. 멍한 표정을 지으며 방을 둘러보는 테츠의 표정을 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리스가 촛불을 꽂은 케이크를 들고 섰다. 테츠가 뒤에 서 있는 쥰을 돌아보자, 쥰은 체 하며 시선을 피했다. (물론 그런 쥰과 억지로 시선을 맞춘 료스케가 입모양으로 넌 끝나고 나서 나한테 죽었어 ㅎ 라는 점언을 남겼음은 다들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돌린 테츠의 놀란 눈에는 희미하게 눈물이 고였다.







"뭠까, 리더!!!! 놀랐슴까!!! 우리가 일주일 전부터 준비했슴다!!!!!"


"캡틴 왜 눈 촉촉하세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빨리 촛불 꺼요 촛불!!!!"


"축하한다 쨔샤, 진짜 그동안 고생 많았다!!!!"


"우가!!!"







다들 한 마디씩 던지는 사이 테츠의 눈은 좌중을 가로질렀다.





"고맙다."








크리스가 살며시 미소를 짓자 테츠 역시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서 촛불을 향해 입김을 불었다. 와아아아아!!!! 박수가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테츠는 머쓱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느 새 그 옆에서 케이크를 들여다보고 있던 쥰에게 크리스가 물었다. 이사시키, 사오라고 한 거 이거 맞아? 어, 어 맞긴 맞는데 진짜 큰거 사 왔다. 야 봐라 테츠, 내가 니 좋아하는 거라고 이거 사 오라 그랬다. 쥰이 씩 웃자 테츠는 쥰을 바라보았다. 테츠가 입을 열어 쥰을 부르려고 하는 순간 료스케가 끼어들었다.






"진지한 얘기 평소엔 별로 안 좋아하지만, 오늘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테츠 네 생일이니까~ 한 마디만 할게."






모두의 눈이 료스케에게 집중되었다.






"이 팀에서 싸웠던 1년 동안, 단 한 번도 너를 캡틴으로 뽑은 걸 후회해본 적 없어. 잘해줘서 고맙고, 대학 가서도 더 좋은 선수 되길 바라고. 음, 사실 더 찐~ 하게 얘기할 수도 있는데 그럼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ㅇ,왜 저를 보십니까 료상!!!!") 아무튼 생일 축하한다고."




료스케가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광경을 본 후루야가 하루이치에게 뭔가 귓속말을 하자, 하루이치는 빵 터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는 듯했다.






"그럼 저도 한 마디만 할래요."



미유키였다.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미유키는 어색한 듯이 헛기침을 하고 테츠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막상 캡틴이 되어 보니까... 선배가 무슨 짐을 지고 타석에 서셨는지 알겠고, 하루하루 어떤 마음이고 어떤 기분이셨을지 제대로 느껴져서 날이 갈수록 선배가 정말 대단한 분이셨다는 생각만 듭니다. 절대 선배만큼 할 수는 없겠지만, 그 발끝만큼이라도 따라가 보려고 노력할 생각입니다. 선배는 저희 팀의 영원한 캡틴이에요. 생일 축하드려요."



"....저거 미유키 카즈야 맞냐?"






쿠라모치가 뜨악한 표정을 짓고 중얼거리자 미유키는 자리로 돌아와 쿠라모치의 다리를 다른 사람 모르게 걷어찼다.






"테츠."




쥰이 테츠의 옷깃을 잡았다. 료스케도 방해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게, 둘이 있을 때 많이 한 얘기긴 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 왜 급 진지해지고 지랄이야 다들!!! 쪽팔리게!!!!"


"워후~~~ 쥰 선배 쪽팔리시답니다!!!!!"


"와아아아아!!!!!"


"닥쳐!!!! 닥치라고!!!!! .....으윽...."








쥰은 마른세수를 한 번 하더니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입을 열었다.







"내가 네 녀석의 부주장이었어서 다행이라고, 임마."







테츠는 살며시 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와 동시에 쥰은 얼굴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아!!!!! 아아아앙아아아 내가 뭔 말을 한 거지!!!!!! 라고 울부짖었다.(..) 그때 사와무라가 손을 들었다. 미유키는 넌 좀 가만히 있으라는 듯이 사와무라의 어깨를 잡고 눌렀지만 사와무라는 왬까 미유키 카즈야!!! 자기도 얘기했으면서!!!! 라고 말하며 소리쳤다.





"리더!!! 리더!!!! 저도 한 말씀 올리겠슴다!!!!"


"...?"


"평소에는 리더가 너무 위엄이 있으셔서!!!! 망가지는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오늘만큼은 리더가 망가진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 무슨 말이지 사와무라?"


"그러니까 말하자면 말임다!!!!!!!"








사와무라는 아직도 케이크를 들고 있는 크리스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크리스 선배!!! 잠깐 저에게 이 케익을 건네 주십시오!!!! 하고서 받아들었다. 크리스는 멍하니 케이크를 뺏기고서 사와무라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테츠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쿠라모치와 료스케는 아하! 하는 표정을 짓고 재빨리 사와무라 곁으로 다가갔다. 미유키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이런 검다!!!!!"


"꺄하, 테츠 선배, 원래 생일빵은 케익빵인 겁니다!!!!!"


"크림 너무 낭비하지 말고~"











시원하게 날아간 케이크가 명중했다. 케이크를 집어던진 사와무라와 쿠라모치가 천천히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모두의 얼굴에 공포와 경악이 서렸다.



 





"저기... 사와무라.... 케이크가 있는 위치가 좀... 높은 것 같지 않냐...?"


"....왜 그러심까 치타 선배.... 리더가 키가 크셨을 수도 있지...."


"키가 크셨다고 해도....뭐랄까...."


"선글라스를 쓰고... 계시진 않았었지....?"









모두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이 케이크를 뒤집어쓴 사람이 천천히 손을 뻗어 얼굴에 묻은 케이크를 떼어냈다. 타이밍 좋게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던 테츠도 뒤를 돌아보더니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크림과 빵을 잔뜩 묻힌 카타오카 감독은 변화 없는 표정으로 방 안에 모여 있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왜 이 시간에 이렇게 시끄럽나 해서 내려와 봤더니.... 반항하는 건가?"


"...."


"이 조잡한 장식들에 케이크는 다 뭐....아하."








흘긋 테츠를 바라본 카타오카는 다시 올 테니 너희들 다 여기 그대로 있어라, 하며 문을 닫았다. 모두들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며 내일 감독님이 기상 시간부터 뺑이를 돌리실 거야!!!!! 라는 공포로 울부짖었다. 그러나 20분 후 나타난 카타오카 감독의 손에는 커다란 케이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유우키의 생일인데 그런 걸 가지고 벌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 케이크는 던지지 말고 놀아라. 하고 돌아서는 카타오카 감독의 뒤에 대고 아이들은 감사합니다 감독님!!!!!을 제창했다. 다시 초를 꽂고 다 함께 촛불을 끈 후, 칼 하나와 포크 다섯 개를 가지고 케이크를 나눠 먹는 동안 쥰이 이건 내가 사오라고 했던 그 케이크가 아닌데.... 하고 시무룩해했던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 end

유우키 테츠야 X 이사시키 준









Out of your league

 







 

 

J는 이번에도 오지 않았다.

소주 한 잔을 들이키고서 T는 소리나게 상에 유리잔을 내려놓았다술기운이 링거 주사처럼 으슬으슬하게 몸 속을 퍼져나가는 느낌이 생경하게 전해지며 얼굴에 피가 몰려 뜨거워졌다원래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처지이긴 하지만 오랜만의 자리에서까지 관리 명목으로 스스로를 다그치기는 싫었다지글거리는 고기 굽는 소리와 시끌벅적하고 낯익은 목소리들은 한데 섞여T의 귀를 쉼 없이 휘감아 댔다바로 옆 테이블에서 실없는 옛날이야기를 낄낄거리는 후배들을 보고 있으면 목소리란 참 더디게 늙노라는 생각이 들었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엇이 그렇게 할 말이 많아서 만나기만 하면 계집애들처럼 수다를 떠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T의 머릿속에 잠깐 익숙한 한 얼굴이 스쳤다그가 왔으면 자신도 저들처럼 말이 많아졌을까.

 



선배님?



 

T는 고개를 돌렸다무스를 발라 멋들어지게 머리를 세운 후배 하나가 술병을 내밀며 씩 웃고 있었다눈가에 잡힌 잔주름을 빼면 자신이 기억하는 열여덟 때의 얼굴을 간직하고 있는 K였다그가 예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옆에 앉아도 되냐 묻자T는 말없이 가방을 치웠다. K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걸터앉고는 상에 팔꿈치를 올린 채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간만에 OB모임인데 주장님이 혼자 마시고 있으면 저희 체면이 뭡니까하며 K가 내미는 잔을 받아든 T는 보일락 말락 미소를 지었다.천성적인 유쾌함은 세월이 파묻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1년 전에 한 의류기업에 취직했다고 했다부장님이 자신의 팬이라느니사인 한 장을 받아가야겠다느니 떠들던 K가 T에게 수첩 한 장을 찢어 내밀었다어제 선배님 경기 회사에서 다 같이 봤습니다. 9회 말 투 아웃 2루 상황에 극적의 역전 투 런역시 우리 학교 간판. T는 미소를 지으며 나름 정성스럽게 마무리한 사인을 내밀었다기왕이면 직관으로 오지 그래장난스런 T의 대답에 K는 낄낄 웃었다.



 

맞다선배 이번에 미국 가실지도 모른다면서요축하주 한잔 하셔야죠?

그래고맙다.

아하하건배술맛 좋그러고 보면 선배님도 OB모임은 지독하게 오랜만 아녜 요이제 TV에서나 본다니까스타야 스타.



 

T는 술잔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갔다가 내려놓았다언론에서 자신을 두고 떠들어대는 말들을 떠올리자 올랐던 취기가 가라앉는 것 같았다. TV니 스타니 하는 말을 들으려고 데뷔한 건 아니었지만학생 시절부터 촉망받던 타자가 필드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수많은 신문 기자들과 카메라들이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게 되었다는 말과 동일했다데뷔한 이래로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춘 지 꽤 되었는데도 기자들의 호들갑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늑대 타자, 9회 말의 사나이체인지업 슈터 등등제 귀로 저를 그렇게 가리키는 말을 듣는 건 몇 번을 겪어도기름진 피자 두 판을 통째로 위에 쑤셔 넣은 것 같이 느글거리는 일이었다프로 선수치곤 얼굴이 돼서 그런 게 아니겠냐며 깐족거리는 K의 등짝을 T는 시원하게 한 대 후려갈겨 주었다기자들의 이목이 늘 부담스러워 경기가 끝나면 누구보다 빠르게 사라지는 T였다덕분에 신비주의 컨셉까지 얻어 호들갑이 더욱 심해졌다는 게 문제였지만.



 

나만 프로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캡틴은 독보적이죠타자로 메이저리그 가는 건 나라에서 두 번째 아녜요?

- ....세 번째야.

하하하뭐야은근히 자랑하시네.


 

얘기 나와서 말인데요이번에 우리 학교 전국대회 본선 갔대요그 고등학교 꺾고. K의 말에 T는 잠시 앞을 바라보더니 아까 내려놓았던 술을 들이켰다입술을 닦자 손등에 술 몇 방울이 묻어나왔다. K는 잠시 T를 살피다 자신이 말을 잘못했냐 물었지만 T는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오래된 TV가 힘겹게 흐릿한 전파를 연결하는 것처럼 고장난듯한 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T의 고등학교는 수많은 프로 선수를 배출해온 야구의 명문고였다그런 학교에서 야구부 주장이자 4번 타자라는 명패를 짊어졌던 T는 학교를 거쳐 갔던 수많은 선수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인재로 촉망받고 있었다그러나 그가 최고 학년이었던 여름,한 발만 내딛으면 전국대회였던 그 결승전에서숙명의 라이벌 고등학교에게 그의 팀은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그 후 T는 곧바로 프로야구에 입문하자는 수많은 구단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일반 대학으로 진학하여 대학 아마추어 팀에서 뛰었다그러던 그를 눈여겨본 한 감독의 끈질긴 구애와고교에서 야구부 감독을 했던 선생님의 설득으로 비로소 프로 세계로 발길을 돌린 것이었다.

 



결국 그렇게 됐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 같이 모이면 그 날이 제일 먼저 생각납디다.

하하네가 병살 하나 잡았었지. 6회 말에.

세상에선배 그거 기억해요아까 R선배는 기억도 못하던데 감동 받았어요.

너무하네.

그쵸같이 잡아 놓고 말이야아으이건 왜 이렇게 쓰냐사실선배님저는 말입니 다우리가 동점 만들었던 때가 솔직히 요즘도 가끔 생각이 난단 말입니다그 때의 그 전율카타르시스라고 할까요그런 기분이 떠오를 때면 다시 그 날로 돌아가서 야구를 하고 싶은...



 

역시 그 날을 바로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당시 라이벌 고등학교에는 현재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투수로 활약 중인 선수가 에이스로 있었다. 3대 4로 1점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감독이 포기하라 지시했던 그 선수의 체인지업을, T가 8회초 2아웃 2스트라이크 1,2루 카운트에 쳐냈던 것이었다.

 



그때 J선배가 뭐라고 하신 줄 알아요? T선배는 감각이 동물이라서 투수가 계산을 해서 돌려세울 수가 없는 타자라고. J선배도 그거 아시고 도루하셨던 거고요.



 

그 때 그 투수에게서 4점을 뽑아낸 것은 전국을 통틀어 T의 팀의 유일했다그리고 아마 그것은 바로 그 J의 도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T는 생각했다야구라느니, 4점이라느니유격수라느니 뭐라뭐라 중얼거리는 K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멀어져 가는 것을 느끼며 T는 술을 한 잔 더 들이켰다. K가 무심코 내뱉은 J의 이름이 귀를 간지럽혔다.

J는 팀의 부주장이자 3번 타자였다주장이자 4번 타자였던 T와는 소위 세트메뉴처럼 붙어 다니던 친구이기도 했다고향에서 야구 유학을 왔던 그는 원래 투수였지만 제구력이 좋지 않아 중견수로 포지션을 바꾼 후타격훈련에 매달려 클린업 자리를 따냈다커다란 목소리우렁찬 기합그렇지만 사실은 170도 되지 않는 조그마한 몸집키가 작은 게 콤플렉스였는지 남자답게 보이고 싶답시고 열아홉의 나이에 턱수염을 짧게 길러 늘 액면가 30대라는 오해를 사곤 했었다하지만 부원 중에 가장 눈물이 많아서속상한 일이 있으면 남들 뒤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던 것도 그였다투수를 그만두겠다고 결정한 그 날에도J는 기숙사 뒤켠에서 고개를 숙이고 웅크린 채 숨죽여 흐느끼고 있었고, T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가 일어설 때까지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T는 빈 술잔에 술을 다시 채웠다.

 


-.. 선배님. J선배 얘기 나와서 말인데요요즘 연락 하세요?


 

불쑥 K가 물었다. T는 멈칫했다.


 

아니끊긴 지 몇 년 됐어.

그래요딴 사람은 몰라도 선배랑 연락 안 되는 거면 진짜 잠수하셨나 보네.

다른 사람도 연락 안 된대?


 

T는 술잔을 비웠다.


 

몰라요애들 다. T선배는 아실 줄 알았는데.

나도 몰라어디 회사 들어갔다는 것까지만 들었어.

- OB모임도 거의 안 나오시고... 2년 전에 선배 안 오셨을 때 한번 잠깐 얼굴 비추고 가 셨다는데 딱히 누구랑 얘기도 안 하고 그냥 가셨대요.


 

J는 패하고 돌아온 그날 처음으로 T의 어깨에 기대어 아이처럼 울었다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고등학교 3학년의 여름에 그들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열아홉의 나이엔 견디기 힘든 가시왕관이었다어깨를 들썩이는 J의 턱에는 정리하지 못한 수염이 지저분하게 눈물에 젖어 있었고 T는 자신의 옷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너도 울란 말이야왜 네가 아직까지 캡틴인 줄 아냐고왜 혼자 울지도 못하고 그러고 있냔 말이야. T는 눈물을 흘렸다.

그 후 프로선수의 길을 일찌감치 포기한 J는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일반 대학수험을 준비했다목이 쉬어라 울던 것치고는 빠르게 길을 정해버리는 모습을 보고 T는 다소 조심스럽게 야구를 그만할 생각인지 물었지만, J는 그런 건 또 아니라고 대답했다지나가는 말로 J는 툭 던졌었다그래도 너 오라는 구단 많아서 다행이다.


두 사람은 같은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J는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했다거기서 학교를 다닐 모양이었다대학생이 된 이후 두 사람은 한동안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T가 J를 만나러 내려갔던 적도, J가 T를 만나러 올라갔던 적도 있었다그러나 학년이 올라가고바빠지고, J는 취업준비생이 되고, T가 대학 야구팀의 주장이 되면서 점차 뜸해진 연락은 T가 프로 데뷔를 하면서 끊겼다. J는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먼저 연락하지 않았고, T는 하루 걸러 있는 경기를 소화하느라 누군가에게 연락을 할 짬을 내지 못했다마지막으로 T가 J의 소식을 들은 것은 그가 한 회사에 정규직으로 취업했다던 5년 전의 일이었다.



 

.

?

건배.


 

목구멍을 타고 강한 알코올이 미끄러져 들어왔다코가 뜨거워지며 얼굴로 열이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이번 팀이 전국체전 본선에 올랐다는 소식이 퍼진 모양인지옆 테이블에서 후배들이 술잔을 들고 ‘S고 야구부를 위하여!’ 라는 구호를 외치는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나 갈게. T는 손등으로 입술을 닦고 잠시 멍하니 있다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가시게요? K의 물음에T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갑에서 5만원 두 장을 꺼내 주었다어이다 일어나세요여기 T선배 가신답니다! K가 소리치자 모두의 주목이 쏠렸다자자곧 메이저리그 가실 자랑스러운 S고 주장님께 박수후배들동기들선배들 할 것 없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머릿골이 윙윙 울려왔다. T는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 가게를 나왔다늦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원한 공기가 뺨을 감쌌다. T는 뒤를 돌아보았다.

 






 

* * * * *

 

몇 주가 흘렀다.

 

늦가을치고는 왠지 맑고 따뜻한 날이었다. TV 안의 기상캐스터는 습도가 높지 않아 빨래를 널거나 외출하기 좋겠다며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아마추어들과 친선경기를 하기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오프 시즌에 접어들자마자 구단 감독은 계열사 한 군데의 사회인 야구팀과 친선경기를 하게 됐다고 떠들어 댔었다그 야구팀 주장이 감독의 아주 친한 친구라던가감독이 그 경기를 매우 하고 싶은 눈치였기에 4번 타자인 그가 참여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T는 몸에 감긴 이불을 느릿느릿 떼어내고 일어나 앉았다시계를 보니 12시 30분이었다. 2시까지는 감독이 말한 친선경기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아직 메이저리그행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계약서만 작성하면 끝날 단계까지 와 있었던 만큼아마 이 친선경기가 국내에서 하는 모든 공식비공식 경기를 통틀어 마지막 경기일 것 같았다.

습관적으로 커튼을 열고 냄비에 물을 받아 인덕션에 올려놓은 채 T는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 아삭아삭 씹었다유리창을 투과해 들어오는 햇빛이 반대편에 그림자를 그렸다그러자 평소보다 집이 더 넓어 보였다사과를 다 먹고 끓인 물을 미숫가루에 부어 한 컵 마신 뒤 간단한 샤워를 하고 머리를 조금 만지고 옷걸이에 대충 던져둔 팀 티셔츠청바지야구잠바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짧고 검은 머리를 한 청명한 눈동자 한 쌍이 거울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나이가 들었군.

입가와 뺨에 진 잔주름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벌써 까끌하게 올라오는 턱수염을 손으로 쓸자 긁힌 손등에 얼얼한 느낌이 남았다. T는 거울 옆의 옷장을 열었다삼십대의 남자가 혼자 사는 집 치고는 깨끗하게 정리된 옷장 안에 나란히 놓인 야구모자들 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고등학교 때 썼던 모자였다바래진 파란색과 튿어진 ‘S’라는 글자. T는 모자를 집어들었다쓴 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먼지가 보얗게 앉아 있었다대충 손으로 먼지를 털어낸 후 모자를 썼다붉은색의 팀 언더셔츠에 얹힌 파란색 모자가 이질적으로 보였다.

꼭 유니폼을 입고 와야 한다고 하진 않았으니까.

T는 그 모자를 다시 조심스럽게 눌러썼다. 1시 20분이었다.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저 밑바닥에서부터 진동하는 무언가가 척추를 타고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모든 세포가 그의 뇌에 이것이 현실인지를 묻고 있었다. T는 눈을 끔뻑였다발을 통해 전해지는 땅을 딛은 감각은 그가 꿈을 꾸는 것이 아님을 일깨웠다.

 

계열사 아마추어 직장인 야구팀이라고....

그래.

 

뭐 문제라도감독이 되물었다. T는 제 눈을 믿을 수 없었다어떤 관용어구로도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할 터였다배트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의 표정을 본 동료들은 무슨 일이냐며 T에게 다가왔지만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그의 팀 가운데에서 그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T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T를 한번 힐끗 쳐다본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개인적인 소식은 모르고 지냈을지라도 세상이 TV에 지배당하고 있는 이상 이곳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그러나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역시 했을 것이다자신은 몰랐어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한 달 전부터 약속되어 있던 경기였다연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혹은 이 경기에서 빠지겠다며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그는 T에게서 제 팀을 향해 등을 돌렸다등번호 1.

T는 옅은 바람에 흩날리는 갈빛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그는 J였다.

 

정렬경례.

 

당연히 그가 주장일 거라고 생각했는데아니었다. J보다 더 잘 치는 타자가 있다는 뜻인지 T는 궁금했다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튼실한 몸집의 상대 팀 주장과 악수를 나눈 T는 초 공격을 결정했다이거이거저희가 말 공격이라니 배려 받는 기분이네요콜드는 적용 안 한다고 하니까 9회까지 재밌게 놀아 보죠마흔은 넘어 보이는 상대 팀 주장이 실없이 웃는 동안 T는 몇 발자국을 사이에 둔 채 여전히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J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날카로운 눈과 짧은 턱수염은 여전했다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조용해진 점이랄까손을 잡고 싶었다안녕오랜만이야이라는 쉬운 인삿말이 T의 혀끝에 맺혔다하지만 꼭 성대가 고장나버린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J는 큰 소리로 기합을 한 번 지르더니 외야로 달려갔다.

외야라니마운드에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그는 그때처럼 중견수 자리에 가서 서 있었다. 1번을 달았으면서 선발 투수가 아니라는 것이본인이 원한 일이었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했다이쪽 벤치와 외야는 거리가 멀어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T는 멍하니 저쪽을 바라보다 동료들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연습 캐치볼이 끝난 모양이다.

 

플레이볼!

 

심판이 경기 시작을 알렸다포수가 사인을 한 채 주저앉았고 투수가 공을 던졌다스트라이크폼이 볼 만 하다. T는 머릿속에 공을 치는 자신을 상상했다아웃이다첫 타자 아웃상대팀 벤츠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J도 함성을 질렀다. T는 배트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아웃은 거기까지였다. 1회 초 공격에서 T의 구단은 2, 3번 타자를 차례로 출루시켰고 4번인 T는 깔끔한 2루타를 때렸다. 1회 득점 3수비하는 모양새나 송구 타입을 보건대 아마추어 치고는 괜찮은 팀 같았지만그래도 프로와의 차이는 당연한 것이었을까이쪽 에이스를 내보내지 않았는데도 2, 3회가 거듭되도록 상대팀은 점수를 뽑아내지 못하고 있었다허허안 봐 주시네요상대팀 주장이 말을 걸었지만 T는 대답하지 않았다. 3회 말에 J가 오른쪽으로 파고드는 크로스 파이어를 쳐냈지만2루수 플라이가 되고 말았다공을 쳐낸 후 이쪽으로 달려오다 플라이를 확인하고는 짧게 욕을 뱉으며 돌아서는 J, T는 끝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1루에 있고 싶지 않았다.

게임은 4회까지 9대 0으로 이어졌다.

 

- 3중견수.

 

5회 말타석에는 J가 섰다실질적으로 이 팀에서 제일 잘 치는 건 저 타자지심심했는지 심판이 T에게 말을 걸자 T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3번 타자가 4번 타자보다 잘 치는 타자라니우스웠다. T는 글러브를 내민 채 숨죽이고 J를 바라보았다커브스트라이크젠장그건 볼이었는데처음부터 손이 나가는 건 여전하구나. T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쌀쌀한 바람이 스쳐 곧바로 땀이 식자 체온이 훅 내려는 느낌이 들었다인코스의 슬라이더스트라이크카운트가 몰렸다. J는 볼을 골라내는 타입이 아니다이번에 치지 못하면 삼진이었다잠시 앞을 바라보던 투수가 팔을 휘둘렀다.

 

까앙

 

금속 배트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 T는 멍하니 날아가는 공을 응시했다공은 좌익수와 중견수를 가르는 외야 바닥에 떨어졌다. J는 맹수가 포효하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달렸다좌익수는 아직 공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이 정도 거리라면 2루타. J가 가까워 왔다공은 아직이었다그의 발이 1루 베이스를 눌렀다.

 

?

뭐야안 달려?

저 장타를 1루타로 끝낸 거야?

 

J가 1루에 멈춰 있는 동안 좌익수는 공을 잡았고 놀랄 만큼 유려한 동작으로 백홈 송구를 성공시켰다투수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마운드를 발로 차며 이쪽을 노려보았다. J는 예의 인상 궂은 표정을 짓고는 입을 꾹 다문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T는 J를 쳐다보았다엉거주춤한 자세로 뛸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새가 열아홉 살 시절의 그에게서 전혀 달라짐이 없었다. T는 입을 떼었다.

 

- J...

좌익수가 잡은 걸 본 것뿐이야.

 

J는 T를 쳐다보지도 않고 툭 내뱉었다안녕이라는 인사도 오랜만이라는 말도 아니었다그저 그런 과격하고 퉁명스러운 한 마디. 5년 만에 만난 친구에게 처음 한다는 말이 좌익수가 잡은 걸 본 것뿐이야’ 라니참 그답다는 생각을 하며 T는 피식 웃었다왜 웃어. J가 불쑥 물었다아냐반가워서. T가 J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J는 총알처럼 튀어나갔다상대팀의 다음 타자가 친 공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T는 글러브를 낀 손을 뻗고 위로 뛰었다글러브 안에 공이 들어왔다쓰리 아웃체인지! J는 멈춰 서서 쳇하고는 뒤돌아섰다벤치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를 T가 뛰어가서 잡았다왜인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J는 부리부리한 인상을 지으며 T를 돌아보았다.

 

.

- ...아니... ...건강해 보인다고...

 

바보 같은 소리를 우물거리는 T를 빤히 쳐다보던 J가 돌연 하하하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건강하다 임마.

- .....

됐어경기 중이니까 끝나고 보자고.

 

J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T의 손을 떼어냈다가까이 서 보니 두 사람 다 열아홉 살 때의 키가 그대로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그는 그대로 자신의 벤치를 향해 멀어졌다. T는 입을 다물었다.

6회 초.

 

잠시 타임.

 

심판이 손을 들어올렸다상대 팀 벤치가 움직이는 듯했다선수교체. T는 눈썹을 올렸다. J가 마운드로 올라오고 있었다.공을 쥔 채로 J는 마운드를 탁탁 발로 쳤다. 1번을 짊어지고 있는 J의 등이 이상하게 낯설어 보였다솔직히 고등학생 때는 상상조차 잘 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기에 T는 그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내심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고 싶었다.타선은 하위 타선이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프로고등학교 시절에팔 힘을 주체하지 못해 폭투를 하곤 했던 그가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을까? T는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 3자 삼진쓰리 아웃 체인지!

 

벤치가 술렁였다. 3타자 연속 스트라이크 삼진외려 담담한 것은 쪽이었다. T는 배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운동장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특기였던 J, 선배들로부터 넌 고함을 안 지르면 못 치는 모양이지라는 말까지 들었던 마당에,그는 조용했다짧게 기른 턱수염이 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그때처럼.

시합은 고착 상태로 빠져들었다고착 상태라고 하기엔 9대 0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이긴 했지만, 8회 말까지 양 팀 모두 점수를 내지 못했으니 그런 느낌이 들 법도 했다타순이 한 번 돌아온 상황에서 T는 J의 공을 치지 않았고 J는 T를 볼넷으로 걸어 나가게 했다모조리 한가운데에 꽂아 넣는 직구치려고만 든다면 못 칠 것도 없을 법 한데도 T는 팔을 뻗을 수 없었다. J가 끝까지 팔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차마 타석에서 J를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어이메이저리그 행 4번 타자님 왜 안 치시는 거세요투아웃 만루 때 그 사우스포 커터볼도 다 치시던 분이낄낄낄동료들이 농담을 걸었지만 T는 한번 웃어주고 말 뿐이었다.

9회 이닝이 왔다.

경기 결과는 누가 봐도 T의 팀이 승리한 것이었다하지만 상대 팀은 그다지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 않다그저 프로들과 한 판 붙어볼 수 있다는 게 재미있는 경기저쪽은 아마추어니까아무도 친선경기에 점수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저쪽 선수들도이쪽 선수들도동료들은 찌뿌둥한 어깨를 주무르고 잡담을 나누었다저쪽 벤치에서 상대 팀의 주장과 실없이 수다를 떨고 있는 감독을 보며 T는 고개를 숙였다그래그때와는 다르다. 1점 하나에 목숨을 걸었던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지금은 질 때도 있고이길 때도 있는 것이다이번에 지면 다음에 이기면 된다시간은 많고 햇수는 바뀐다몸값이 높아지고 낮아지고의 문제가 달려 있을 뿐프로의 세계에서 되갚을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 승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 4. 1루수.

 

T는 타석에 섰다. J와 눈이 마주쳤다불타고 있다의지로 형형하게하품을 하며 타석에 서는 T의 동료들을 상대로 그는 이어지는 이닝 내내 스트라이크를 던졌다언제 저런 투구를 하게 되었는지 T는 알지 못했다헬멧을 눌러 눈을 가렸다창피하게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자신의 어깨에 몸을 기대어 들썩이던 J의 감촉이 여적 남아 있는 듯했다그럴 것이다아마 은퇴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 몇 번이고 다시 싸울 기회가 있을 것이다하지만 어렸던 날의 승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마지막 여름, J와 자신의 마지막이었던 그 여름은,

 

스트라이크!

 

돌아오지 않는다승부는 단 한 번뿐이다되갚을 기회가 있는 승부란 없다.

지면 끝이다.

J가 다시 팔을 휘두른 건 눈 깜짝할 사이였다공은 포수를 향해 직선으로 날아왔다보기보다 빠르다고 느껴진 순간 공은T가 휘두른 배트 밑을 스치고 뚝 떨어졌다.

싱커볼.

J의 표정에는 미동이 없었다그는 시구를 끝낸 자세 그대로 표정 없이헛스윙을 한 T를 바라보고 있었다. T는 자신에게 꽂힌 채 번득이는 J의 시선을 맞받아치며 배트를 들었다.

돌아올 수 없는 시간 앞에서 너를 그 무대에 데려다주지 못했다.

내가.

 

J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왼쪽으로 내리찍듯이 휘두른 T의 배트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든 직구를 쳐올렸다좌익수! J가 소리를 질렀다날아오르는 공의 궤적을 보며 뒤로 성큼성큼 물러나던 좌익수의 등이 펜스에 닿았다.

 

솔로 홈런!!!

역시나 메이저리거!!! 아 확정은 아니고...

저 자식칠 거면서 왜 아까까지 안 쳤대?

 

T는 베이스를 밟으며 팔을 쭉 뻗었다. J의 표정은 미묘했다기분이 나쁜 것 같기도 했고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몹시 괴로운 것 같으면서도 싫지 않은 것 같았다왜 안 쳤냐고? T는 벤치로 들어가면서도 J를 쳐다보지 않았다.

 

 






* * * * *

 

게임은 그렇게 끝났다. 9회 말, J에게 타선은 돌아오지 않았고 깔끔한 10대 0의 완승이자 완패로 양 팀은 정렬했다주장과 하는 둥 마는 둥 한 인사를 나눈 후 T는 벤치로 돌아가려는 J를 몸으로 막아섰다.

 


?

끝나고 술 한잔 하자.

둘이?

.

나 회사 사람들이랑 회식할 거 같은데.

안 돼.

 


J는 T를 빤히 쳐다보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뭐야너 안 된다는 말도 할 줄 아냐?

나랑 마셔.

야야우리 5년 만에 처음 만나는 거라고어색하지도 않아?

- 5년 만이니까 나랑 술 마셔.

하이고.

 

난 너 어색한데 어떡하냐? J는 시원하게 웃었다농담이야얼굴 펴 인마알겠어오랜만에 베스트 프렌드를 만났는데 회포는 풀어야지여기서 기다려. J는 T의 가슴을 주먹으로 한 번 치고는 회사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아까까지 주장이었던 사람과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던 J는 가방을 든 채 T에게로 걸어왔다알겠대그래그럼 가자어디 갈까술 마시고 싶다며술집너 좋을 대로난 치킨집도 좋아. T는 차키를 꺼내들었다.

 

 



어어. TV로 다 보고 있었어.

 

J는 한 잔 더 원샷을 했다보기와 다르게 술이 센 편이 아니었던 것 같아서, T는 그에게 너무 빨리 마시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J는 낄낄거리며 손을 내저었다이쪽 테이블을 힐긋거리던 몇몇 사람들이 T에게 혹시 야구선수 아니냐며 말을 걸자T는 정중히 그렇다고 대답하며 사인 요청을 거절했다사람들이 다녀갈 때마다 J는 피식피식 웃었고 T는 그 웃음에 묻어 있는 물기를 외면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 LA 다저스랑... 아니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맞지?

아니필라델피아 필리스.

아 그래뉴스는 너 다저스로 결정됐다고 하던데 맞냐?

아마도.

좋겠구만출세했네.

 

T는 대답하지 않고 J를 바라보았다골뱅이소면을 먹던 그가 응하고 고개를 들었다.

 


있잖아.

?

너 오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어?

.

그런데도 나온 거야?

나오면 안 되냐?

 

뻔뻔한 듯 능글맞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T는 처음 자신을 발견하고 눈에 띄게 시선을 피하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지금도 묘하게 그는 자신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나 만나니까 싫어? T는 J를 찌르듯이 쳐다보았다. J가 찔끔하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그럼 왜 나를 봤어도 아무 말도 걸지 않은 거야? T는 자신이 말하고도 못나게 들린다는 생각이 들어 문득 창피해졌다그거야너한테 내가 먼저 아는 척 하면 피곤해지니까 그렇지너도 그렇기야 하겠지만난 윗사람들한테 조금이라도 튀는 꼴을 보이면 안 좋을 수도 있단 말이야. J가 술을 마셨다우린 이제 고등학생이 아니라고.

 


너 직급 낮아?

좆밥 과장이다.

네 윗사람은 누군데?

우리 야구팀 주장님.

그 사람이 보스야?

우리 부사장님이거든.

부사장..? 나이 별로 안 많아 보이던데?

낙하산이지임마요즘 세상에 실력으로 부사장 올라가는 새끼가 어딨어.

그 사람 지독하게 못 치더라. 4번 타자는 무슨빽이겠지?

빽이지 뭐... 크으.


 

근데 진짜 기막힌 우연 아니냐이 빌어먹을 놈의 사회라는 곳에 나와서 예고 없이 니 면상을 마주칠 줄이야역시 너랑 나3년 동안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있었던 인연이 아직도 안 끝났나 보다이모여기 소주 하나 더요참이슬로. J는 T의 잔에 술을 따랐다우연우연... 낄낄낄어쨌든 만나서 반갑다반갑다는 소리 빨리도 하네건배.

 

- K가 네 소식 묻더라.

어어그 새끼가만났어?

몇 주 전에 OB모임이었거든넌 안 나왔지만.

아하... 바빠서... 그래서 뭐라고 했어?

나도 연락 끊겼다고 대답해 줬지.

 


J는 잠시 말없이 소면을 뒤져 골뱅이를 찾아 우물우물 씹었다.


 

서운하드냐새꺄.

- ....

새끼지만 바쁜 줄 알아나도 니 연락 없어서 서운했다 마.

- J.

서운한 줄 알면 니가 먼저 연락을 하든가... 맨날 TV에 나오니 모른척할 수도 없고에이 시벌오늘 니 와서 만나면 웃기겠다 싶어서 나왔는데 막상 보니까 한 대 갈겨 주고 싶으면서도니미럴.

 


J가 또 술을 한 잔 들이키는 동안 T는 식탁 가장자리에 얹혀 있는 J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마디마디가 잡혀 있지만 어딘가 조그맣고 가느다란 손. T는 무심코 그 손을 잡았다뭐야 너? J가 당황하며 손을 빼려 했지만 T는 놓아주지 않았다잠깐만닿은 손가락엔 느껴지지도 않는손바닥의 굳은살.


 

너 연습했구나.


 

J의 얼굴이 펌프질을 한 듯 붉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사람 손을 갖다가 뭐하는 거야?

오늘 너 스플리터랑 싱커볼 던졌지?

....

고등학생 땐 스트라이크도 못 넣었잖아그래서 외야 가라는 얘기까지 듣고.

그건....

그런데 여기서 등번호 1번 달고...

.

그러면서 왜 계속 타선은 3번 치는

!

 


J가 소리나게 술잔을 내려놓으며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 기색에 움찔한 순간 손을 홱 빼낸 J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T는 입을 다물고 J를 바라보았다.


 

그 얘기 하지 말자.

- J.

아까 말했지우리 고등학생 아니라고.

- ...

착각하지 마라너야 야구빠따 움직여서 돈 버는 사람이지만 나는 아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J는 담배를 피워물었다옆에 있는 사람 몇이 인상을 쓰며 돌아보는 듯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T는 J를 마주본 채 침묵을 지켰고, J는 담배연기를 빨아 T의 코에 내뱉었다식탁에 팔을 걸치고 손가락에 담배를 끼운 채 한참 연기를 머금던 J는 재떨이를 잡아당겨 불을 껐다눈이 마주쳤다.

 

- T.

.

그래 봤자 너한테 홈런 맞았다 나.

- ...

 

너한테 홈런 맞았다... 자신의 목소리를 메아리질하며 J가 얼굴을 감쌌다. T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 * * * *

 

핸드폰 번호 줄게.

그러든가.

 

J는 다소 말수가 줄어든 것 같았다취한 것 같으면서도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번호를 입력하면서 흘긋 살펴본 전화번호부에는 T의 이름이 없었다. J의 휴대폰으로 자신에게 전화를 걸자 그의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었던 번호와는 다른 번호가 화면에 떴다. T는 J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연락 자주 해.

그래.

가자.

 

T는 먼저 일어나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했다. J는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발끝으로 땅을 툭툭 치는 모양새가 그 때의 버릇과 똑같았다카운터 거울에 비친 J의 모습을 바라보던 T는 쓴 미소를 지었다지갑에 카드를 넣고 가게 문을 열자 딸랑하는 맑은 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번졌다. J는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 더 있을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고, T는 짤막하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데려다 줄게.

웬일이냐나 기숙사 살 땐 먼저 말 안하면 우산도 안 씌워 주던 놈이.

 

J는 키득댔다그래도 좀 기분이 풀어진 것 같았다이젠 자동차가 있으니까 우산 씌워줄 필요는 없잖아재미없는 놈같이 우산 쓰는 게 얼마나 로맨틱하냐? T는 그에게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옛날에는 자전거 태워 주더니 이젠 자동차 태워 주네너 아직도 자전거 못 타귀찮아. J는 조수석에 앉은 채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창문에 팔꿈치를 얹어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T는 시동을 걸고 페달을 밟았다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자동차 바퀴의 감각이 의자를 통해 온몸에 전달되었다.



 

- J.

.

결혼은 했어?

 

이 타이밍에 그게 무슨 병신 같은 질문이야창밖을 바라보던 J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T는 미동하지 않고 앞을 바라보았다.

 

- ....할 뻔 했어어쩌다 보니 날짜 잡고 파혼했지만.

그래.

너는 결혼 안 하냐영화배우 누구랑 사귀지 않아?

헤어졌어.

진짜그런 기사 안 뜨던데?

얼마 안 됐어.

그래아쉽네예뻤던 거 같은데.

 

그리고 둘은 침묵했다.

오랫동안 차 안은 고요했다간혹 네비게이션이 말하는 쪽이 아닌 다른 길을 가리키는 J의 목소리만 물결이 퍼지듯 공기에 찰랑거렸다오래지 않아 J의 집 앞에 T의 차가 도착해 있었다중견 기업의 한 미혼 과장이 살기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깔끔한 아파트였다.

 

다 왔어.

 

내려야지라는 다음 말은 나오지 않는다여전히 팔꿈치를 창문턱에 올린 채로 밖을 멍하니 내다보는 J의 옆얼굴을 T는 눈을 끔뻑거리며 바라보았다차 안에 짙게 내려앉은 어둠이 얼굴에 그림자의 굴곡을 만들고 있었다.

 

- J.

- ....

아까 술집에서 했던 말은 미안해.

그거 알아?

 

불쑥 J가 입을 열었다. T는 입을 다물었다.

 

너한테 가는 건 말이야.

꼭 뜬공인 줄 알고 잡으러 뛰어갔던 게 홈런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어.



 

뭔 뜻인지 알아? J가 돌아보았지만 T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래계속 몰라라잘 가데려다 줘서 고마워. J는 크게 웃어보이고는 차문을 닫았다창문 너머로 아파트 건물 계단을 올라가는 J의 등을 한참 응시하던 T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손을 뻗어 조수석 등받이를 만지자 어렴풋이 남은 온기가 닿았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T는 자신이 울었음을 알았다.





 

 

* * * * *

 

또다시 몇 주가 흘렀다. T는 감독에게 허락을 받은 후 팀의 연습에 나가지 않았다그 동안 고등학교에 찾아가서 겨울 합숙을 하루 정도 지도해 주거나 고교 시절의 은사인 감독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등의 잡다한 일을 했다. J와의 연락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T가 전화를 걸면 늘 부재중으로 끝났고하루 뒤에 바빠서 받지 못했다며 문자연락이 오는 경우가 태반이었다.그럴 때면 T도 적극적으로 반응할 수가 없었다그렇게 드문드문 연락을 잇다 채팅창이 멈춘 지 한 주 정도 된 후였다.


T의 메이저리그행이 확정되었다. LA 다저스에서는 1150만 달러로 T와의 계약을 성사했다곧이어 기자들이 집 앞으로 몰아닥치기 시작했다기자를 싫어하는 T였지만이번만큼은 기자들의 카메라와 질문세례를 버텨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집 앞에서샤워를 막 마친 채 아무 옷이나 입고 수염도 깎지 않은 채로 기자라는 족속을 마주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T는 기자들과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팀 동료를 통해 자신의 출신 고등학교에서 정식 기자회견을 갖고 싶다는 의견을 표명했다곧 스포츠 신문란에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전국 야구팬들의 열띤 댓글들이 속속 달렸다.

 

그런데 T, 왜 굳이 학교에서 기자회견 하고 싶단 거야?

나한테 의미 있으니까.

 

그래... 뭐라 딱히 받아칠 말도 없는 T의 대답에 동료들은 김이 푸시시 새는 느낌을 받으며 돌아서곤 했다.

기자회견 당일에 학교는 시끄러웠다당연했다야구부 졸업생 중에 성공가도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 선배님이 메이저리그 행 기자회견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야구부들은 매우 흥분한 모양인지 새벽부터 운동장 청소를 했다고 했다그 선수님아니 선배님은 솔직히 다른 건 몰라도 잘생겼잖아여학생 매니저들은 들뜬 표정으로 떠들어 댔다거창한 건 싫습니다그냥 학교 그라운드가 잘 나오게 찍어주세요. T는 짧게 말한 후 야외에 설치된 기자회견 부스로 들어갔다은사님으로서 함께 기자회견에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다며 T가 직접 부탁한 탓에 고교 감독님도 함께 부스로 들어왔다이미 부스는 기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다행히 양쪽이 트여 있어 어느 정도는 그라운드와 연습하는 선수들이 보였다어이 어이 인마 너 선배를 앞에 두고 공을 어따가 보내는 거냐어엉그라운드의 한 녀석이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T는 문득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잠시 고개를 돌려 눈을 비볐다.

 

기자분들 다 모이셨나요?

그럼 이제 시작하죠!

네에, T선수는 준비되신 건가요?

- ....

다행이네요자 그럼 이번에 LA다저스에 1150만 달러로 이적 결정하신 T선수ㅡ 요즘 계 속 인터뷰를 하지 않으셔서 이렇게 기자들과 마주하는 것도 아마 오랜만이실 것 같은데 요지금 기분이 어떠신지-


 

천천히 카메라를 둘러보며 막 입을 열려던 T의 시선이 문득 부스 언저리의 그라운드 귀퉁이에 가 꽂혔다. T는 흠칫하며 손으로 책상 모서리를 꽉 움켜쥐었다.


 

J는 잠시 뒤 천천히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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